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2월 22일은 1년 중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다. 겨울이 시작됐다는 뜻으로 차츰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이날 붉은 팥죽을 나누며 액운을 쫓고 가족의 안녕을 빌었다. 모진 겨울을 나기 위한 가장 지혜롭고도 따뜻한 풍습이었던 셈이다.
기억 속 어린 시절의 겨울은 오늘날의 추위와는 그 결부터 사뭇 달랐다. 아침 일찍 세수를 마치고 무심코 무쇠 문고리를 잡으면, 손바닥이 '쩍쩍' 달라붙을 만큼 매서운 냉기가 온몸을 타고 흘렀다. 문밖의 바람은 문풍지를 사정 없이 떨게 하며 매서운 존재감을 과시하곤 했다. 동장군의 서슬이 시퍼렇게 날 서 있던 그 동지 섣달의 풍경은, 역설적이게도 방안의 온기와 팥죽 한 그릇의 소중함을 가르쳐준 엄한 스승이었다.
어린 날의 따뜻한 기억

▲따뜻한 동지팥죽. ⓒ AI생성이미지
어둠이 가장 깊게 내려앉은 저녁이 되면, 우리 가족은 낮은 밥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온돌방에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아궁이에 가득 지핀 군불 덕에 아랫목의 온기가 엉덩이를 타고 기분 좋게 번져올 즈음, 어머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죽을 정성스레 내려놓으셨다. 방 안을 가득 채운 고소하고 달큰한 향기가 차가운 공기를 단숨에 녹여내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숟가락을 들기 전, 우리에겐 짧지만 설레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다. 뜨거운 김이 한풀 꺾이고 나면 신기하게도 죽 표면 위로 얇고 부드러운 분홍빛 '막'이 내려앉았다. 그것은 추운 겨울날 팥죽이 스스로를 보호하려 덮은 보들보들한 담요 같기도 했고, 자식들을 위해 어머니가 씌워둔 비단 덮개 같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는 그 막이 팥죽이 주는 첫 번째 선물처럼 느껴졌다. 숟가락 끝으로 조심스레 걷어 올려 입에 넣으면, 식으면서 응축된 팥의 진한 풍미가 혀끝에 착 감겼다. 보드랍고도 쫀득한 그 찰나의 식감은 동지 팥죽이 선사하는 최고의 별미였다.
이어 본격적으로 숟가락을 휘저으며 보물찾기를 하듯 찾아내던 하얀 새알심은 또 얼마나 반가웠던가. "나이 수대로 먹어야 진짜 한 살 더 먹는 것"이라는 어른들의 농담에, 괜히 마음이 조급해져 동생의 그릇을 힐끔대며 새알심 개수를 세어보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사실 팥은 예나 지금이나 건강에 탁월한 보약이다. 팥은 단백질과 비타민 B1이 풍부해 겨울철 기력을 돋우고 부기를 빼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양갱, 빙수, 팥빵 등 현대적인 간식으로 변모해 남녀노소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지만, 내게는 여전히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그 투박한 팥죽이 으뜸이다.
새해를 맞이하며 끓이는 팥죽
이제는 온 가족이 무릎을 맞대고 앉던 그 좁은 방의 온기도 그리운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기억 속 팥죽의 붉은 빛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을 데워주는 등불처럼 남아 있다. 가장 긴 밤이 지나면 반드시 해가 길어지듯, 그날의 팥죽 한 그릇은 내게 어떤 추위도 이겨낼 수 있다는 어머니의 다정한 응원이었으리라.
어느덧 2025년의 끝자락, 마지막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올해 동지에는 투박한 손길이나마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아내와 함께 팥죽을 쒀보려 한다. 그 시절 어머니의 정성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팥죽 김 속에 우리 부부의 소박한 이야기와 온기를 꾹꾹 눌러 담아낼 생각이다.
이번 동지에는 소중한 사람과 따뜻한 팥죽 한 그릇 나누어 보시는 건 어떨까. 붉은 팥죽 한 그릇에 한 해의 묵은 액운은 멀리 실어 보내고, 가장 깊은 밤을 지나 비로소 밝아올 새해의 서광(曙光)을 기쁘게 맞이하길 기원드린다. 기억 속의 붉은 등불이 그러했듯, 모두의 마음속에도 오래도록 식지 않는 다정한 온기가 머물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