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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전공과목 가운데 소설 쓰기 수업이 있었다. 수업을 담당했던 한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소설을 쓰지 못하게 했다. 소설을 쓰지 못하게 하는 소설 수업이라니? 그는 소설 말고 실제 경험담을 써오라고 했는데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거창하고 치기 어린 글을 억지로 지어내는 건 자기 이야기의 가치를 몰라서, 혹은 경험을 드러낼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던져진 주제는 스무 살 언저리의 학생들에겐 제법 파격적이었다. 자기 삶의 금기에 관해 쓰거나 아니면 문학 속 인물 가운데서도 기행적인 인물에게 편지를 쓰는 식이었다. 기숙사에서 매일 얼굴을 보고 붙어 다니던 친구가 절대 공개할 수 없을 법한 경험을 대담하게 고백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발표 중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수업은 점점 영화에서나 볼 법한 집단 심리치료처럼 흘러갔다. 급기야 자기 고백을 강요당하는 게 싫다면서 경험했을 법한 일을 지어내는 친구들도 생겼다. 의도와 다르게 수업의 원래 목표인 소설 쓰기에 도달한 셈이다. 한 학기 동안 명확하게 배운 게 있다면 '모든 서사의 출발은 자신'이라는 거였다.
분열하는 자아

▲온라인 콘텐츠를 만들면서 어느덧 '내 이야기'는 금기가 되어버렸다 ⓒ 픽사베이
이후로 나는 책을 쓰고 칼럼을 연재하면서 경험, 직관, 무의식 너머의 기억 같은 것을 신줏단지 모시듯 했다. 왜 아니겠는가, 모든 출발점이 그곳인데? 그런데 갑자기 내 이야기는 금기가 됐다. 영상 콘텐츠를 만들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사항이 '절대 내 이야기를 늘어놓지 마라'와 '아무도 내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는다'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콘텐츠 세상에서 나라는 사람은 필요 없다. 나의 조각이 필요할 뿐이다. 쉽게 말해 나를 잘게 쪼개서 팔릴 만한 부분을 반복적으로 내세워야 한다. 무엇을 팔지 선별이 끝나면 그때부터는 소비자의 편의대로, 그들이 관심을 지불하고 싶은 방식대로 보여줘야 한다.
예를 들어서 운동하는 일상을 무작정 나열할 게 아니라 '일주일 내에 3킬로그램 감량하는 법'이라는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창작자의 개성이 죽더라도 소비자 니즈를 우선순위에 둬야 한다.
차라리 은행 잔고를 공개하는 게 낫지 나의 무엇을 팔겠는가? 그나마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게 있다면 키와 몸무게였다. 다이어트와 식단을 주로 다루는 여성 크리에이터들은 보통 자기소개를 키와 몸무게로 대신한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162cm/48kg'이라고 써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168cm/56kg이라고 써 붙여야 하나? 겨울이라서 활동량이 줄었고 마지막으로 체중을 쟀을 때보다 2kg 정도 불어난 것 같은데 그쯤은 속여도 되는 걸까? 원래 1~2kg은 왔다 갔다 하는 거니까.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는 '운동하는 여자'를 쓰면서 여성들에게 보이는 몸이 아니라 움직이는 몸, 기능하는 몸에 집중하자고 했던 사람이다. 그런 내가 조회수를 의식하느라 키몸빼(키에서 몸무게를 뺐을 때 결과값이 110이 돼야 이상적인 몸무게라는 인터넷상의 공식)를 내세우고 그걸 정체성으로 삼는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온라인에서 내 자아는 퇴화할 위기였고 나라는 사람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두 세계에서 모순적으로 분열하고 있었다.
뇌를 썩게 만들거나, 분노를 유발하는 콘텐츠들

▲분노를 유발하는 콘텐츠들이 늘어나고 있다. ⓒ unsplash
퇴화하는 건 자아뿐만이 아니었다. 원래도 명석하다고 할 수 없는 두뇌가 점점 더 제 기능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옥스퍼드사전을 발간하는 옥스퍼드대 출판부에서 지난해에 선정한 '올해의 단어'는 '브레인롯(brainrot)'이다. 직역하면 '뇌가 썩는다'라는 뜻으로 현대인들이 SNS에서 저급한 콘텐츠를 과잉 소비하는 현상을 우려하며 등장한 표현이다. 누구에게나 의미 없는 콘텐츠를 반복적으로 시청하며 뇌가 멍해지고 그런데도 시청을 멈출 수 없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모두의 뇌가 공평하게 썩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일까? 이 문제의 원흉은 뇌가 썩는 콘텐츠를 내놓는 창작자인 것 같지만 창작자야말로 누구보다 콘텐츠를 많이 소비하므로 그들의 뇌가 썩는 건 당연하다. 그런 그들에게 뇌보다 더 중요한 건 팔리는 것이다. 마음 좋게 아무에게나 관심을 주지 않는 냉정한 소비자들을 상대로 관심을 유도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유행에 민감한 대중음악은 이러한 변화가 가장 급진적으로 나타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음악에 맞춰 틱톡 영상을 만들 수 있게 자극적이고 반복적인 훅을 누가 더 잘 만드느냐에 따라 곡의 성패가 갈리게 된 것도 벌써 오래전 일이다. 이제는 이런 음악에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최근에 나온 '샤넬(Chanel)'이라는 곡은 새삼스럽게 충격이었다.
가수 타일라(Tyla)가 부른 이 곡은 훅송이 다 그렇듯 딱히 전개랄 게 없다. '나를 사랑하면 샤넬을 사줬어야지'라는 후렴구만 반복된다. 누구나 아는 명품 샤넬, 샤넬을 사달라고 그야말로 노래를 부르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 춤과 틱톡 챌린지…. 이 곡은 온라인에서 크게 바이럴 될 만한 요소를 모두 갖췄고 실제로 반응이 매우 뜨겁다.
그런데 이 노래는 '요새 노래가 다 그렇지'라고 체념하며 넘길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 감정의 실체는 잔잔하게 번지는 분노였다. '샤넬 백을 사줘야 사랑'이라는 가사는 된장녀, 꽃뱀 밈이나 영어권의 골드 디거(gold digger, 돈을 목적으로 이성과 사귀는 사람) 서사와 너무 쉽게 포개진다. 음악마저 소모적인 논쟁의 소재가 돼야 하는가?
마침 옥스퍼드대 출판부에서 선정한 올해의 단어가 바로 '분노 미끼(rage bait)'다. 분노 미끼는 분노를 유발하고 클릭을 유도하려고 설계된 콘텐츠를 뜻한다. 이 단어는 디지털 플랫폼이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어떻게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분노는 온라인에서 발생하는 여러 감정 중 가장 화력이 좋은 연료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계속 자극해 관심을 유도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시장 논리다. 일찌감치 분노의 상품성을 알아차린 한국의 인터넷 생태계는 분노 미끼보다 거의 7년이나 앞서서 인터넷상의 분노를 의식했다. '킹받는다'(인터넷에서 유행한 신조어로 '매우 열받는다', '엄청나게 화났다'라는 뜻이다)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한 때가 2018년 무렵이다. 이후 분노를 유발하는 방식은 더욱 고도화됐다. 세대 갈등, 여성혐오, 인종 차별, 정치적 쟁점 등이 분노를 유발하기 좋은 소재이고 그 방식은 극단적인 거짓 선동, 이분법적인 논리 전개, 맥락 없는 몰아가기 등이다.
그러나 이런 세태 속에서도 어떤 사람은 결국 자기 이야기를 한다. 문제는 내가 나를 드러내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는가'이다. 그래서 나는 플랫폼의 요구에 맞춰 나를 조각내기보다 내가 정한 기준을 떠올린다. 가끔 흔들릴지라도 내 서사를 온전히 소유한다는 원칙만은 지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