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근무는 오랫동안 노동자의 일·생활 균형을 지원하는 핵심 제도로 인식되며, 특히 경력단절 위험이 큰 여성의 노동시장 복귀와 지속적 고용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로 강조돼 왔다. 그러나 많은 연구에서 유연근무가 일터에서의 양성 간 평등을 자동적으로 보장하지 않으며, 그 효과가 노동자의 성별·직업·계층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구조적 한계를 지닌다는 점을 꾸준히 제기해왔다.
본 글은 기존 연구들을 검토해, 유연근무가 실질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그 이용 가능성이 어떻게 성별 불평등과 불안정 노동의 구조와 맞물리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유연근무의 형식적 보편성과 실질적 접근 사이의 간극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유연근무의 젠더화된 접근성
유연근무에 대한 접근성은 성별로 불균등하게 배분돼 있다. 여성은 가정 내 돌봄·가사 책임을 주로 떠맡고 있어 남성보다 유연근무가 더욱 필요하지만, 실제 이용률은 낮게 나타난다. Chung 등(2024)의 연구에 따르면 법적으로 유연근무제도가 있어도, 성별·직군·계약형태에 따른 이용격차가 크게 나타나며, 특히 서비스업·판매업·돌봄업 등 여성 비중이 높은 산업에서는 유연근무 신청 자체가 쉽지 않다.
남성의 경우에는 제도적 접근성이 여성보다 높은 직종에 종사하지만, 유연근무 사용을 여성적 행위, 혹은 직장에 대한 비헌신적 행위로 간주하는 '문화적 낙인'이 존재해 실제 사용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Chung, 2018). 이러한 현상은 유연근무가 사회적 성별 고정관념과 결합할 때 발생하는 문제를 보여준다.
재택·모바일 근무는 여성에게는 돌봄 부담과 결합해 보이지 않는 초과노동을 증가시키는 반면, 남성에게는 추가 노동시간과 경력 이익으로 이어지기 쉽다(Carstensen, 2020).

▲유연근무의 확산이 곧 더 나은 노동의 보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AI 생성 이미지
유연근무는 돌봄 부담을 덜어주는 제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과 가정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여성의 이중부담을 강화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가 확대되면서 이 문제는 더욱 두드러졌다.
김지현(2021)의 연구는 이러한 경향을 명확히 보여준다. 저자는 한국노동패널을 분석해 팬데믹 기간 중 재택근무를 하는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평균 1.5배 증가한 반면, 남성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결과적으로 여성은 가사·돌봄과 유급노동이 동시에 늘어나 끊임없는 노동상태에 놓이게 된다. Fares & Oliveira(2023)의 브라질 사례 연구 역시 비정규·저숙련 여성들이 시간제의 이름 아래 불규칙 노동과 돌봄을 병행하며 주당 총 노동시간이 90~100시간에 이르는 사례를 제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연구들은 유연근무가 돌봄 책임의 사회적 분담을 강화하기보다는, 오히려 돌봄 부담을 개인에게 재배분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유연근무와 자기 착취(Self-Exploitation)
유연근무의 또 다른 문제는 자율성 확대라는 명분이 오히려 노동자의 자기 통제를 강화하게끔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Chung(2022)은 유연근무가 실제로는 노동자가 스스로 노동강도와 시간을 관리해야 하는 새로운 규율체제로 이어질 수 있으며, 그 결과 노동자는 '항상 준비된(ever-available)'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원격근무나 프로젝트 기반 직무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특히 강하다. 근무시간 외에도 업무 메시지에 즉각 반응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지고, 일과 휴식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패턴이 고착된다.
Grabham(2022)은 여성들이 유연근무를 활용할 때 오히려 정서적 고립, 신체적 피로가 누적되며, 공적 돌봄 지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기 착취가 강화된다고 지적한다. 여성은 돌봄·가사 노동과의 이중부담, 남성은 주 소득자 역할과 성과 압박 때문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제도의 영향을 받게 된다.
조직문화와 제도적 낙인
유연근무의 효과를 결정짓는 것은 조직문화도 한몫한다. 많은 기업에서 여전히 시간투입으로 성과를 평가하는 규범이 지배적이며, 노동자들의 유연근무 사용은 조직에 대한 헌신의 부족으로 해석되곤 한다. 이는 성과 평가와 승진 과정에서 불이익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특히 남성이 유연근무를 사용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다.
신경아·이은아(2021)는 가족친화기업 사례 분석에서 유연근무 이용자들이 업무에 덜 헌신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례가 상당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남성은 유연근무가 여성적 행위라는 인식 때문에 더 큰 낙인을 감수해야 했고, 여성은 제도 활용 후 오히려 더 높은 성과 압박을 경험했다.
유연근무의 확산이 곧 더 나은 노동의 보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부 국가에서는 유연근무 확대가 불안정 노동의 제도화로 이어진다는 연구가 다수 존재한다.
EIGE(European Institute for Gender Equality, 2017)의 연구에서는 이를 '유연성 함정(flexibility trap)'이라 부른다. 특히 여성에게 제공되는 유연근무가 종종 비자발적 시간제, 제로아워 계약, 불규칙 근무시간 등 불안정 노동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브라질 사례 연구(Fares & Oliveira, 2023)에서도 노동개혁 이후 유연근무제와 불안정 계약이 동시에 확대됐으며, 특히 돌봄·보육·보건·청소 등 여성 비중이 높은 직종에서 그 경향이 두드러졌다. 즉, 유연근무가 선택이 아닌 강제의 형태일 때, 이는 안정된 일자리의 유연화가 아니라 불안정 노동의 고착화를 의미하게 된다.
모두에게 평등한 일터가 되기 위해
유연근무가 모두에게 합리적인 제도가 되기 위해서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 우선, 시간 통제권 강화를 통해 노동자가 자신의 근무시간을 스스로 설계하고 결정할 수 있는 실질적 권한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절대적 시간을 중심으로 하는 평가의 기준을 합리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셋째, 공공 보육·요양 확대와 남성 돌봄휴직 보장 등 돌봄의 사회화가 필수적이다. 넷째, 유연근무 낙인을 완화하고, 성별과 직군을 넘어 모두가 제도를 사용할 수 있는 등 조직문화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다층적 변화를 통해 유연근무는 기존의 젠더 불평등과 불안정 노동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장치가 아니라, 일·생활 균형을 지원하여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제도로 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Chung, H. (2018). Gender, flexibility stigma and the perceived negative consequences of flexible working in the UK.SocialIndicators Research, 151(2), 521–545. https://doi.org/10.1007/s11205-018-2036-7
Chung, H. (2022). The Flexibility Paradox: Why flexible working can lead to (self-)exploitation. Policy Press.
Chung, H., et al. (2024). Flexible working arrangements and gender equality in Europe. European Commission, Directorate-General for Justice and Consumers.
European Institute for Gender Equality. (2017). Gender, skills and precarious work in the EU: Research note. EIGE. https://eige.europa.eu/resources/ti_pubpdf_mh0217250enn_pdfweb_20170503163908.pdf
Carstensen, T. (2020). Flexibility in working time and place of work: Old gender inequalities and new patterns of division of labor through digital transformations. Zeitschrift fur Arbeitswissenschaft, 74(3), 195-205.
김지현. (2021, 10월). 재택근무제도 사용이 근로자의 시간사용에 미치는 성별효과 연구. 한국노동연구원.
Sabbag Fares, L., & de Oliveira, A. L. M. (2023). Free to Choose? The Gendered Impacts of Flexible Working Hours in Brazil.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55(1), 166-186. https://doi.org/10.1177/04866134221089993
Grabham, E. (2022). Women, precarious work and care: The failure of family-friendly rights. University of Kent.
신경아, & 이은아. (2021). 젠더 관점에서 본 유연근무제의 필요성과 딜레마. 가족과 문화, 33(4).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의 노동안전보건 월간지 <일터> 12월호에도 게재됩니다. 이 글을 쓴 신희주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 운영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