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 박열의 추도식. 이후 박열은 건국훈장에 추서되기까지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 박열의사기념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에 붙잡혀 재판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극심한 고문으로 폐인이 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독립지사들의 불굴의 신념과 애국혼은 청사에 길이 남는다. 그 중에 박열(朴烈, 1902~1974)을 빼놓을 수 없다.
20대 청년 박열은 일본 도쿄에서 노동을 하며 공부하고 있었다. 독립정신이 투철하여 아나키즘계열의 독립운동 단체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는 조국을 침략하고 지배한 원흉이 바로 일황이라 단정하고, 일황 부자를 폭살하고자 시도했다. 1923년 9월 도쿄대지진이 일어나고 그는 예비검속되었다.
일제는 '대역사건'으로 규정하면서 그와 일본인 연인 가네코 후미코를 재판에 회부했다. 1926년 2월 26일 제1회 공판이 대심원 특별형사부에서 열렸다. 수감 3년여 만이다.
박열은 공판에 앞서 1925년 9월 4가지 조건을 법원에 제시했다. 한국인의 자존심을 일제에 알리는, 일본 재판사상 전무후무한 내용이다.
첫째, 나 박열은 피고로서 법정에 서는 것이 아니다. 너 재판관이 일본의 천황을 대표해서 법정에 서는 것인 이상, 나는 조선민족을 대표해서 법정에 서는 것이다. 천황을 대표하는 일본의 재판관이 법관을 쓰고 법의를 입는다면, 나도 조선 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조선의 왕관을 쓰고 조선의 왕의를 입는 것을 허락할 것.
둘째, 나 박열은 피고로서 법정에 서는 것이 아니라 조선 민족을 대표하여 일본이 조국 조선을 강탈한 강도 행위를 탄핵하고자 법정에 서는 것이기 때문에 재판관이 일본의 천황을 대표해서 나의 질문에 답변하라. 즉 내가 법정에 서는 취지를 내가 선언하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셋째, 나 박열은 일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조선어를 사용하고 조선어로 말하도록 해 달라. 조선어로 말할 터이니 통역을 준비할 것.
넷째, 일본의 법정이 일본의 천황을 대표한다고 해서 재판관은 높은 곳에 앉고, 일본의 천황에게 재판받는 나 박열은 낮은 곳에 앉는 터이다. 그러나 나는 소위 일반 피고와는 다른 사람이다. 때문에 내 좌석을 너희 일인 판사의 좌석과 동등하게 만들어 달라.
박열이 요구한 4가지 조건에 대하여 대심원 심판부에서는 여러 날 동안 숙의한 결과 첫째와 둘째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 셋째 조건은 통역을 두는 것이 도리어 의사소통이 어려워진다고 거부됐다. 넷째 조건은 들어주어도 좋으나 세평이 있기 때문에 참아달라고 재판장이 부탁하여 박열이 철회하였다.
이리하여 박열은 조선의 국왕을 상징하는 의복을 갖추고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박열은 후세 변호사가 조지훈의 아버지 조헌영의 집에서 구해온 조선시대의 구관복(舊官服)과, 당시까지만 해도 신랑이 혼례 시에 예복으로 입던 사모관대(紗帽冠帶) 차림으로 법정에 출정했다.
또 피고라는 용어 대신 재판장은 박열을 '그대' 또는 '그편'(일본 말로 '소치라')이라고 부르고 박열은 재판장을 '군' 또는 '그대'라고 불렀다. 이 역시 일본의 식민지 재판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박열은 공판에 앞서 제시한 전제조건뿐만 아니라 경찰에 이른바 '보호검속'되고서부터 아주 당당하게 대응했다. '보호검속'이란 행정집행법의 적용으로 검속된 박열에 대해 경찰서 경부보 한 사람이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심문했지만 그 기록은 완전히 백지 상태였다. 그 이유는 이렇다.
"나는 보호를 받기 위해 검속되었지 범죄를 추궁당하기 위해 검속된 것이 아니다. 보호받기 위해 검속된 것이 아니다. 보호받기 위해 검속된 나에게 경찰관이 범죄를 취조할 권한은 발생하지 않는다. 법에 의해 보호될 권한을 가지고만이 범죄를 취조할 수 있는 것이 경찰관의 입장일 것이다. 또 법에 의해 보호되는 경찰관한데만이 범죄를 취조당하는 것이 국민의 의무이다. 법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경찰관으로부터 취조 받을 의무는 없다."
그 이상 한마디도 응하지 않은 것이 제1회 경찰취조에 대한 박열의 답변 태도였다.
박열은 행정집행법 적용의 보호검속이 끝나고 경찰법 처벌령에 의해 구류 29일을 선고한 후 재차 사법경찰관이 취조하려 할 때 이렇게 말했다.
"이미 나는 경찰법 처벌령에 의해 구류를 받고 있는 기결수이다. 기결수에 대해 다시 취조를 하려는가. 취조를 다시 하지 않으며 안 될 실태가 있다면 즉시 구류 언도를 취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역습하였다. 이에 사법경찰관이 "구류를 언도한 경찰법 처벌령 이외의 사건으로 취조하고자 한다."라고 말하자 "그렇다면 그 조사에 응하지 않음은 나의 자유다. 나는 응하지 않겠다. 자유를 주장한다."라고 외치고 취조를 거절했다. 그리하여 경찰관계에 있어서는 한 장의 조서도 못 받게 했다.
박열 사건은 연인과 두 사람 외에는 모두 경찰서와 검사국의 조사 기록이 근거가 되고 이를 조서로 채택했다. 그러나 두 사람만은 전혀 달랐다. 피고 사건 취조 권한을 보호하고 있는 것은 현행범에 한하고, 현행범 이외의 사건에 대해서는 단순수사 처분으로 관계자의 모든 것이 임의진술하는 경우가 아니면 검사라 해도 청취서를 작성할 권한이 허가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취서라 이름한 조서 중 검사가 질문한 것뿐이어서 조서가 무효가 된 판례도 있는 것이다.
박열은 처음부터 검사의 강제심문권을 부정하고 스스로 임의진술을 하지 않는 한 취조서를 작성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검사의 심문에 응하지 않고 거절하여 한 장의 검사청취서도 남기지 않았다.
박열은 사형이 선고되었다가 무기로 감형되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감옥에서 일수로 8,091일, 연역으로 22년 2개월 동안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당시 세계 감옥사에서 단일사건으로 22년 옥고를 치르고 살아남은 혁명가는 그가 처음이었다. 연인은 감옥에서 의문사를 당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고, 6.25 한국전쟁 때에 납북되었다.
덧붙이는 글 | [붓의 향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