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시분과위원회에서 기획한 '시로 읽는 오늘'을 연재합니다. 시로 아침을 시작한다면, 수많은 갈등과 전쟁도 줄어들 것입니다. 독자들은 힘 있는 언어를 익혀 튼튼한 내면을 가꿀 수 있고, 다양한 시를 통해 새로운 시민의 감수성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의 첨예한 문제를 시인의 예민한 감각으로 길어 올린 한국시를 매주 두 편씩 선정하여, 추천 글과 함께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근무
- 임승유
울타리를 지날 때 나도 모르게 쥐었던 손을 놓았다. 나팔꽃의 형태를 따라 한 것이다.
오므렸다가 폈다가
안에 든 것이 뭔지 모르면서 그랬다.
살아 있다면
뛰어다녔을 것이고 뛰어다니면 어지럽고 뛰어다니면 시끄러우니까 쉬는 시간인가 보다 그러면서 붓 같은 걸로 살살 털어주면서 붓을 갖다 놓으면서 문을 닫고 나왔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창백한 도감이었는지도 모른다.
물가에 앉아서 생각에 빠져서 종이에 싸 갖고 온 것을 풀어보다가 아무것도 없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머니에 넣어 오다니 내일은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천천히 일어날 때
쏟아지는 빛의 한가운데였다.
물감이 마르는 동안이라고 했는데
아직 거기 남아서 꿈틀대고 있었다. 여전히 내가 뭔가 쥐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출처_시집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문학과지성사, 2020.
시인_임승유 : 2011년 <문학과사회>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그 밖에 어떤 것>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생명력 전개>가 있다.

▲손 안에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꿈틀거렸다. ⓒ ⓒ박유하 시인(디지털 포엠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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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이었다. 내가 하려던 게 뭐였을까, 하고 가만히 멈춰 서 있던 날이었다. 그게 뭐였는지 모르는 채로 그것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두 손이 따뜻해질 때까지. 주먹을 쥐었다가 펼쳐보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버린 것 같기도 했다. 내가 하려던 게 뭐였는지, 그런 게 정말 있기는 했는지 알 수 없었고 믿을 수 없었다. 시를 쓰는 동안이었다. (박규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