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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4 14:52최종 업데이트 25.12.14 14:52

거창하지 않은 식물의 고백

권정민 그림책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손자에게 그림책을 읽어준다. 읽어주는 그림책 속에서 나의 동심을 발견하기도 하고 교훈을 얻기도 한다

도서관에 들어서자 정면에 전시된 그림책 포스터가 시선을 잡았다. 시원스레 뻗은 초록 잎들이 마치 우리 집 거실의 화분처럼 익숙했다. 자연스레 손이 가 책장을 넘기니, 아침 빛을 들여다보는 듯 잔잔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식물이 인간을 바라본다는 설정은 단순한 전복을 넘어, 삶의 부드러운 결로 사유를 끌어올린다. 권정민 작가가 그림과 문장을 함께 빚어낸 그림책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2019년 8월 출간)는 온통 녹색으로 감돈 그림 속에서 식물들의 담담한 시선을 펼쳐 보인다.

책표지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책표지『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 문학동네

식물의 눈으로 읽어낸 인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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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식물에게 '관찰자'라는 역할을 부여한다. 베란다, 사무실 구석, 요가원, 혹은 바빠서 주인을 잃고 방치되는 자리까지. 식물의 자리는 고정되어 있지만, 그 시선은 인간보다 넓고 깊다.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말은 느리고 사려 깊어, 상처에 닿아 따뜻하게 스며든다.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에는 묘한 온기가 있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나를 이해해준다면, 그 대상이 식물이라 하더라도 마음의 파동이 잔잔히 흔들리지 않을까.

책 속의 식물은 인간이 선택한 식물들이다. 사무실, 카페, 도서관, 집안의 화장실과 거실 등에 놓여 공기를 정화시켜 준다는 식물들이다. 그 식물들을 필요로 하는 장소와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식물의 시선에 비친 인간은 대체로 바쁘고 지쳐 자기 마음은 물론, 물 줄 틈조차 내지 못한다. 집안의 식물이 말라가는 줄도 모른 채 방치하는 모습에서 깊은 피로가 느껴진다. 버려진 식물은 인간을 꾸짖지 않는다. 그저 있는 힘껏 버티고, 견디고, 새로운 생을 살아낸다.

다행히 식물의 고요한 목소리에 귀 기울인 이가 있었다. 길가에 버려져 시들어가던 식물을 주워 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 두고 정성껏 돌본다. 물과 햇빛을 되찾자, 버려졌던 생명은 새로운 자리에서 다시 살아난다. 자리가 맞지 않아 시들다가도, 누군가의 손길에 닿아 기운을 차리고, 창가에서 이웃 식물에게 인사도 건네는 느긋한 생명력. 이 느긋한 생명력이 인간의 성급함을 고요히 감싼다. "아직 괜찮다" "너도 결국 살아갈 것"이라 말해주는 듯하다.

버려졌던 식물의 이야기는 생명의 순환과 연결성을 되새기게 한다. 미처 알지 못했던, 혹은 무심코 지나쳤던 생명의 결이 여기에 있다. 책 속 식물들은 인간에게 배운 점을 언급한다. 적성에 맞지 않는 자리에서도 조금은 견뎌보는 법, 견디다 보면 좋은 날이 오리라는 기묘한 희망. 이 대목을 읽으면서 독자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될 것이다.

식물의 고백은 거창하지 않다. 그 작은 숨소리 같은 문장들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인간보다 훨씬 조용한 존재가 세상을 바라볼 때, 삶은 오히려 더 정확하고 서늘하게, 그러나 한없이 따뜻하게 포착된다. 작가의 마음이 그럴 것이다.

 다행히 누군가는 우리의 작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마지막 힘을 다해 당신을 불러봅니다.
다행히 누군가는 우리의 작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마지막 힘을 다해 당신을 불러봅니다. ⓒ 문학동네

그림 속 녹색의 숨결

책은 색채로도 말을 건넨다. 권정민 작가 특유의 단정한 채색, 섬세하고 부드러운 연필의 결, 빛이 스치는 자리에 생기는 은근한 온기. 그림 속 녹색은 화려하지 않고, 차분하게 눌러 담긴 초록이다. 이 때문에 더 오래 바라보게 된다. 말라가는 잎의 누런 얼룩조차 삶의 기록으로 읽힌다.

책을 덮고 나면, 방 한켠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식물이 새삼 다르게 보인다. 잎의 결이 말을 걸어오는 듯하고, 빛을 향해 천천히 몸을 틀던 순간들이 삶을 향한 노력처럼 느껴진다. 식물이 인간을 관찰해 왔듯, 이제는 인간이 식물을 돌아볼 차례다.

 당신은 우리에게 시간과 정성을 들이고 우리에게 완전히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시간과 정성을 들이고 우리에게 완전히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 문학동네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는 비록 유아 그림책으로 분류되지만, 생명과 환경을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이 책이 유아부터 100세까지의 독자에게 필요한 이유다. 책을 덮으며 식물들이 건넬듯한 질문에 귀 기울여 본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이렇게 조용한 위안이 되었었나요?
지금 당신 옆의 작은 생명들에게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고요하지만 깊고, 단정하지만 오래 남는 책. 책장을 넘길 때마다 초록의 숨결이 방 안에 옅게 퍼지는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스토리에도 실립니다.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권정민 (지은이), 문학동네(2019)


#반려식물#환경#삶#문학동네#권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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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으로 삶을 읽다

천천히 스며드는 글을 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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