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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잉바스켓 마스터 실기 최종선발에서 탈락한 비운의 작품 '세로왕자'는 그 후 어떻게 됐을까?
할배네 이웃 이보시 의원 현관에서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할배가 늘 신세지고 있는 병원이라며 그곳에 선물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네가 갑자기 감기라도 걸릴 수 있으니, 이런 기회에 원장 안면을 터놓는게 좋지 않겠느냐는 실용적인 조언도 한몫했다. 아무튼 잘 됐다. 할배네 있어봤자 호스 물벼락을 맞다가 조만간 말라죽을 게 뻔한데 불행중 다행이다.

▲병원 현관에 서 있는 모습이 다채롭고 우아하다. 멀티칼라로 왕자의 화려한 기품이 물씬 풍긴다. ⓒ 유신준
새벽에 공원 산책을 나갈 때면 항상 세로왕자를 본다. 병원 현관에 서 있는 모습이 다채롭고 우아하다. 투톤칼라 보색 대비의 귀여운 가로공주에 비한다면, 멀티칼라로 단장하여 왕자의 화려한 기품이 물씬 풍긴다. 샙그린을 주조로 한 풍성한 색 표현은 기존 대비 조화와는 또 다른 매력이다.
만약 오사카 행이 지금쯤이었다면 예정대로 세로가 선발되었을 것이다. 가로공주는 은상 수상 후 오사카에 남게 되어 다시 볼 수 없게 됐지만, 세로는 이곳에 남아 매일 아침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행잉바스켓 인생 새옹지마다. 선발과 탈락. 어느 쪽이 더 나은 운명이라 말할 수 있을까.
가로왕자와 세로공주의 역전드라마처럼, 배색과 디자인에 따라 행잉바스켓의 운명이 갈린다. 세상 일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지만, 그나마 오류를 줄여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색상대비를 더 파고들어야 한다. 배색 디자인은 앞으로 내 행잉바스켓 인생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색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다. 색은 항상 다른 색과의 대비를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떤 색과 어울리는가에 따라 같은 색이라도 다른 인상을 가지게 된다. 배색은 관계에 따른 느낌이 중요하다.
교과서에서 배운 배색 디자인 기본은 두 가지다. 인접색 배색과 보색 배색이었다. 인접색은 유사색이다. 색상환에서 보면 인접한 최단 거리에 위치하는 색이다. 인접색은 동일한 색소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으니 형제간이나 사촌 쯤 된다. 색깔이 비슷하면 서로 잘 어울리는 속성이 있다.
비슷한 파장으로 경계가 흐릿해지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안정적이며 편안한 느낌을 준다. 눈을 자극하지 않아 오래봐도 식상하지 않다. 배색 교과서같은 건 본 적도 없는 옛 사람들도 이미 갈파한 인접색 진리가 있다. 초록은 동색이요, 유유상종이라 하지 않던가.
인접색은 너무 평범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밋밋하고 얌전한 배색이라서다. 이럴 때는 보색대비가 필요하다. 보색은 색상환에서 반대편에 위치한 색이다. 유전자 색소가 1도 안 섞였으니 이건 생판 남이다. 경계가 분명해지니 서로 으르렁거리게 된다. 이른바 적대적 공생관계다. 인접배색과 비교하면 밍밍한 콩나물 국에 고추가루 한 스푼을 확 풀어놓은 것처럼 화끈해진다.
화끈한 것도 문제는 있다. 잘못 사용하면 촌스럽거나 지나치게 튀어서 거슬리는 느낌을 줄 수 있다. 설령 어울리는 배색이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자극적 화려함은 오래 볼수록 체감되는 성질이 있다. 미인도 사흘이면 질린다는 속담처럼, 너무 눈을 자극하게 되면 오래 못 가고 싫증나는 법이다.
배색의 키워드는 대비다. 인접색이든 보색이든 마찬가지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대비를 작게 할 것인가 크게 할 것인가 두 가지다. 대비가 약하면 편안하며 무난해 보이고 강하면 두드러져보여 활력이 생긴다. 이런 특징을 주어진 조건에 적합하게 적재적소 표현하는 것이 색의 조화다.
인접대비나 보색대비에 명도나 채도 대비가 더해지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색채대비 효과는 다양한 원리만큼이나 깊고 오묘하다. 패션잡지의 배색을 눈여겨 보신 일이 있으신가? 행잉바스켓과 결은 좀 다르지만 패션은 배색 공부의 끝판왕이다. 전문가들의 배색 감각은 볼수록 시선을 끌어당긴다.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배색 조화는 화장지로 비둘기를 만드는 마법의 세계다.
작가 정미경은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라는 소설에서, 달의 수동성을 인간관계에 은유했다. 옆방 총각 승우의 입을 빌었다. '대부분 우린, 별이 아니라, 스스로 빛나지 못하는 차갑고 검은 덩어리예요. 존재란 스스로 빛날 수 없는 것,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만월도 되고 때론 그믐도 되고 그런 것 같아요.'
행잉바스켓을 공부하는 내가 보기에, 정미경은 배색 원리의 핵심을 제대로 은유한 것 같다. 색상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다른 색이 없으면 그저 한 가지 색상으로 무의미하게 존재할 뿐이다. 색이 빛날 수 있는 건 인접색이건 보색이건 대비 색상이 존재하고 나서다. 다른 색과의 관계속에서 비로소 만월도 되고 그믐도 되는 거다. 대비 색상이 없으면 그저 심심한 색상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과의 관계없이는 인간의 삶이 그저 '차갑고 검은 덩어리'에 불과한 것처럼.

▲색이 빛날 수 있는건 관계 덕분이다. 다른 색과의 관계속에서 비로소 만월도 되고 그믐도 되는 거다. ⓒ 유신준
나는 교과서가 가르치고 있는 두 가지 기본 만으로 배색 디자인이 완성되리라고 믿지 않는다. 공부란 의심하는 데서 시작하는 게 옳다. 강을 건넜으면 배를 버리듯 교과서를 넘어서야 한다. 죽은 물고기만이 강을 따라 흐른다. 살아있는 것들은 힘차게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법이다.
행잉바스켓의 배색 문제를 근본적으로 돌파하기 위해서는, 이 길을 먼저 간 배색 고수들의 지혜를 빌려야 한다. '색채론'을 쓴 괴테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작가 괴테는 사실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아름다움이란 객관적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름다움이란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관찰자와 대상의 관계'에서 발생되는 거라고. 아름다움이란 사물 자체의 특성이 아니라 그 사물을 바라보는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미의식이 다른 것이니까, 느낌도 사람마다 당연히 달라야 한다. 교과서를 뛰어넘는 깊은 통찰이다.
사실 완전하게 조화로운 배색이라는 목표는 비현실적이다. 세상에 아름다운 색상 조화는 수 없이 다양하니까. 이론을 너무 고집하다보면 이론에 갖히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괴테의 맥을 이은 이텐은, 규칙을 배우는 이유는 그것을 깨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보편적 언어를 배운 후 자기배색을 발견하고 그 길을 가라는 것이다. 교과서를 마쳤으면 그것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 계시다.
괴테가 말한 '자기만의 색깔'은 오늘날 더욱 중요해졌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세상을 온통 삼킬 거라며, 대체될 수 없는 것을 찾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다. 그 핵심은 자기만의 색깔을 찾으라는 이론과 일맥상통한다. 그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의 독창성은 아직 대체 불가영역이다.
선발되지 못한 세로왕자는 이곳에 남았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는 아니었다. 이보시 의원 현관에서 매일 아침 환자들을 위로하며, 나와 조우하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다. 혼자서는 빛나지 못하지만,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찾는 것. 그것이 배색의 진리이자, 삶의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