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예비평가 김상천이 최근 펴낸 <케이 서사 열전> 책 표지<케이 서사 열전>은 한국 사상사를 실재론이 아닌 유명론의 관점에서 최초로 해석한 작품이다. 놀라운 점은 시대별 작가의 작품 속에서 독창적인 한국형 서사체 이론을 발견하여 이를 사상적 계보로 명료하게 밝힌 점이다. ⓒ 하성환
문예비평가 김상천이 펴낸 <케이 서사 열전>(사실과 가치, 2025년 9월)은 원효에서 한강 작가까지 총 14명을 다룬 대중 문예 철학서입니다. 시대별로 한국형 서사체 작품을 유명론의 관점에서 해석한 문예 비평서입니다.
한국 철학의 종조이자 유명론의 비조인 원효의 대승적 '불일(不一)사상'은 동일성, 전체성에 대한 미적 거리 두기입니다. 당대 보편자인 중국 중심주의를 거부하면서 진리는 현실 세계 어디에도 존재한다고 설파합니다. 중앙권력이나 중국을 지향하기보다 오히려 현실 속 개별자인 민중의 삶에서 진리를 마주합니다. 이는 한국 고유의 주체성 형성으로 한국 철학의 민중적 기원이 됩니다.
이후 고려 무인 정권 시기 대시인인 이규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서사시 '동명왕편'을 통해 해모수를 '하늘의 아들(天子)'로 표현합니다. 그리스 신화 제우스처럼 묘사하며 당대 세계의 중심인 중국과 대등한 문화적 자부심을 당당하게 드러냅니다.
'동명왕편'은 운문과 산문을 번갈아 구술한 구전 서사 형식으로 원효 이후 전례가 없는 새로운 형식의 작품입니다. 바로 민중적 이야기 형식인 산문을 가미해 한민족의 고유한 기원을 신화와 설화 형식으로 표현함으로써 당대 전체성, 동일성을 상징하는 보편자로서 중국이란 실재를 거부합니다.
운문(시)이면서 산문(이야기, 소설)이지만 그렇다고 운문(시)도 아니면서 산문(이야기, 소설)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의 독특한 한국형 서사체 형식을 창조해 냅니다.
원효에서 시작해 이규보, 일연, 김시습, 서경덕, 정철, 허균, 홍대용, 연암 박지원을 거쳐 근대 문학 시기엔 만해 한용운과 임화, 그리고 백석 시인의 작품을, 그리고 현대 문학 시기엔 김수영과 한강 작가의 작품까지 유명론의 관점에서 독자적이면서도 고유한 한국형 서사체 이론을 추출합니다.
프랑스 철학 최후의 거장 알랭 바디우는 세계 철학의 전성기를 고대 그리스 철학 시기, 근대 독일 관념론 철학 시기, 현대 프랑스 철학 시기 등 3대 철학 시기로 분류합니다. 니체를 종조로 하는 20세기 프랑스 니체주의자들, 바로 푸코, 데리다, 바르트, 들뢰즈, 라캉, 바타유, 블랑쇼 등 프랑스 현대 철학의 거장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오면서 20세기 파리는 현대의 아테네를 방불케 했습니다.
21세기를 맞은 오늘날은 과연 어떨까요? 문예 비평가인 저자는 무척 조심스럽게 분석하고 접근합니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 세계 5위의 군사력, 그에 더하여 인구 5천만 국가 가운데 1인당 GDP 3만 $이 넘는 세계 7대 대국(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한국)에 당당히 속해 있음을 주시합니다. 더구나 다른 경제 대국들이 밟았던 제국주의 수탈이 아니라 거꾸로 식민 통치를 받았던 유일한 나라임을 강조합니다.
2021년 유엔에서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분류했을 만큼, 21세기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한 유일무이한 국가로 문화를 꽃피울 물적 기반을 공고히 했습니다. 그를 바탕으로 21세기 한류를 넘어 K-pop, K-beauty, K-food, K-drama, K-democracy 등 K-culture가 세계의 주목을 받습니다.
특히 프랑스 현대 철학의 거장 푸코에 비견할 만큼, 김수영의 서사성 짙은 작품, '폭포', '육법전서와 혁명', '거대한 뿌리'를 언급하면서 김수영을 '세계성을 획득한 철학 하는 시인'으로 평가합니다.
2024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역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2019)과 넷플릭스 한국 드라마 '오징어게임'(2021) 등 소프트 파워가 뒷받침된 한국형 서사체 문화의 전성기에 힘입은 바 큽니다.
노벨문학상을 발표하면서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 작가의 작품에 대해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 인간의 연약함과 고통을 드러낸 시적 산문 형식의 독창적·실험적인 글쓰기"라고 평가합니다.
김상천의 <케이 서사 열전>은 한국 철학사를 유명론의 관점에서 그 사상적 계보를 명징하게 밝힌 역작입니다. 특히 역사, 철학, 문학을 섭렵한 문예 비평가답게 '한국형 서사체'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학계와 문단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