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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0 08:44최종 업데이트 25.12.10 08:44

퇴직 후 모처럼 알바 다녀온 남편을 보며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자신의 역할과 쓸모를 찾는 일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알바 다녀올게!"

남편은 간만에 출근 복장을 챙겨 입고 나섰다. 지난 여름 정년퇴직한 남편은 직장과 별개로 몇몇 기관의 컨설팅 위원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다. 물론 딱히 정해진 근무처가 있다거나 정기적인 업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간혹', '어쩌다가', '가뭄에 콩나듯이' 컨설팅 업무를 맡거나 정기적인 워크숍 등을 갖는다. 말 그대로 소일거리 삼아서 하는 소소한 아르바이트이지만, 돈보다는 내심 아직 사회와 연결된 끈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지난주 협회의 담당자와 한참 통화를 하더니 기다리는 전화가 있는 눈치였다. 얼마 후 인천의 한 업체가 의뢰한 컨설팅을 맡게 되었다며 회사대표와 시간약속을 하는 걸 들었다. 그 약속 일이 바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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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외출은 거의 공유오피스 아니면 나와 함께 쇼핑몰이나 마트를 가는 것이 전부라 그간 출퇴근할 때 입던 신사복 바지는 꺼내어보지 않은 지 오래다. 어차피 입을 일이 거의 없을 것 같아 계절이 바뀌었지만 꺼내지 않은 것도 여러 벌이다. 이제 남편의 옷장 속엔 청바지, 티셔츠 같은 캐주얼의류들이 대부분이다.

오늘은 간만에 칼주름이 잡힌 겨울용 신사복 바지를 꺼내고, 셔츠도 갖추어 입고 집을 나서는 남편을 배웅했다. 서류 가방을 들고 운동화가 아닌,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서는 남편에게 인사를 건네려다 문득, 어제 같기도 오래전인 것 같기도 한 지난 어느 하루의 아침이 되돌아온 것만 같았다.

남편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알바 다녀올게!"

나도 손을 흔들며 맞받아 주었다.

"돈 많이 벌어와!"

그런데 남편이 나가는지 십분도 안 되어 도어락의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싶어 내다보니 멋쩍은 얼굴로 남편이 다시 들어왔다.

"자동차 키를 놓고 갔어."

그러고 보면 남편은 지난 반년 동안 운전도 몇 번 하지 않았다. 원래도 운전을 즐기지 않아 함께 이동할 때는 거의 내 차로 움직이던 참인데, 그나마 출퇴근을 안 하니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을 정도로만 운행을 해왔다. 서류 가방을 들고 나서면서도 이제 차 키 챙기는 걸 깜빡하는 거냐며 놀림을 받고서야 다시 나갔다.

남편이 나간 후 나는 집 안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오후에 강의하러 나가야 하는 날인지라 부지런히 청소기를 돌리고, 욕실 청소도 했다. 그러다 문득, 이처럼 혼자 오전을 보내는 건 제법 오랜만이라는 데에 생각이 이르렀다.

뜨거운 여름 꼭대기의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온 남편과 함께 여름, 그리고 가을을 보냈다. 그리고 겨울을 맞이했다. 반년이라는 시간을 되돌아 생각해 본다. 지난 시간은 참 빨리도 멀어져가서 남편이 매일 이른 아침에 서류 가방을 들고 출근하던 날은 아주 오래전인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원래부터 아침이면 함께 커피를 내려 마시고, 집안일을 나눠서 하고, 점심을 무얼 먹을까 고민하는 날들이었던 것만 같은 것이다.

내가 오후 강의를 마치고 집에 올 때쯤 남편도 인천의 거래업체에서 컨설팅 미팅을 마치고 돌아왔다. 다음 주에 한 번 더 가야 일을 마무리할 것 같다고 한다. 인천까지 간 김에 퇴직 전 거래업체에도 들렀었다며 오늘 하루의 이야기를 하는데 어쩐지 다른 날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건 준비하던 자격증 시험에 붙었다거나,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날 때의 얼굴과도 또 달랐다. 어쩌면 아직 사회적인 관계가 연결되어 있고, 소진되지 않은 자신의 쓸모가 있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꼭 돈을 버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에겐 역할이 필요하고, 자신의 쓸모를 찾는 일은 중요하다. 특히 노년에는 더욱 그러하다. 젊은 날에 비해 책임과 의무가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다. 슬기로운 은퇴 생활의 첫걸음은 아무래도 자신의 역할과 쓸모를 찾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퇴직#은퇴#시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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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원 (wantwon) 내방

책을 읽고, 여행을 하며, 글을 씁니다. 나름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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