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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5 10:25최종 업데이트 25.12.15 10:25

당연하고 지극한 일이 달라졌다고 느낄 때

[시로 읽는 오늘] 임경섭 '처음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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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작가회의 시분과위원회에서 기획한 '시로 읽는 오늘'을 연재합니다. 시로 아침을 시작한다면, 수많은 갈등과 전쟁도 줄어들 것입니다. 독자들은 힘 있는 언어를 익혀 튼튼한 내면을 가꿀 수 있고, 다양한 시를 통해 새로운 시민의 감수성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의 첨예한 문제를 시인의 예민한 감각으로 길어 올린 한국시를 매주 두 편씩 선정하여, 추천 글과 함께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처음의 맛
- 임경섭

해가 지는 곳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나무가 움직이는 곳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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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담근 김치의 맛이 기억나지 않는 것에 대해
형이 슬퍼한 밤이었다

김치는 써는 소리마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고
형이 말했지만
나는 도무지 그것들을 구별할 수 없는 밤이었다

창문이 있는 곳에서
어둠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달이 떠 있어야 할 곳엔
이미 구름이 한창이었다

모두가 돌아오는 곳에서
모두가 돌아오진 않았다

출처_시집 <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창비, 2018
시인_임경섭 :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죄책감> <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종종>이 있다.

 모두가 돌아와야 할 자리에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가 돌아와야 할 자리에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 박유하 시인(디지털 포엠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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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에서 해가 뜨고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듯, 당연한 일들이 있습니다. 이 시는 어느 날 내 세계의 당연하고 지극한 일이 달라졌다고 느낄 때 쓰여집니다. 다시 보니 창문 가장자리에서는 어둠이 새어 나오고, 달의 자리엔 구름만 자욱합니다. 한때 선명하고 확실했던 엄마와 엄마의 김치, 그리고 그에 대한 형의 슬픔이 이 밤을 불러왔습니다.

김치는 써는 소리마저 다르다던 형의 말처럼, 형제의 기억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집니다. 모두가 돌아오던 자리에서 누군가 돌아오지 않을 때 남은 자에겐 처음의 맛이 소중해집니다. 기억은 희미하거나 부재하는 방식으로조차, 당신과 나의 삶을 다시 선명하게 합니다. (배수연 시인)

#임경섭시인#처음의맛#우리는살지도않고죽지도않는다#한국작가회의#시분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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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시로 읽는 오늘

(사)한국작가회의는 이 땅의 대표적인 문인단체로서 표현의 자유와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정신을 계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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