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취가정. 억울하게 죽은 장군이 권필의 꿈에 나타나 취시가를 읊고, 권필이 화답시로 혼령을 위로했다는 곳이다. ⓒ 이돈삼
조선 광해군 시대 문인 석주(石洲) 권필(權韠)은 올곧은 선비였다. 양촌 권근이 7대조로 명문가 출신이다. 권필은 임진왜란의 책임을 물어 당시의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를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해군 3년에 진사 임숙영(任叔英)이 임금의 시정을 비판했다가 시련을 겪었다. 이를 지켜보던 석주가 '궁류시(宮柳詩)'라는 제목의 풍자시를 지었다.
宮柳靑靑 亂飛
滿城冠盖媚春暉
朝家共賀昇平樂
誑言解遺出布衣
대궐버들 청청한데 꾀꼬리 어지럽게 날아들고
성안에 가득 찬 관개(冠盖)는 봄볕이 아양떠네
조정에선 승평낙을 하례하건만
누가 시켜 베옷 입은 선비를 내쫓았는가.
궁류시(宮柳詩) 라는 제목의 시 한 편으로 석주의 일생은 운명이 바뀌게 되었다. 석주는 선조가 그의 시를 항상 서안(書案)에 두고 찬탄해 마지 않을 정도로 당대의 뛰어난 선비였다. 예조에 참예하라는 왕명을 받고도 출사하지 않고 강화도로 내려가 인재 양성을 위해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여기서 궁류(宮柳)는 당시의 권세가 유희분 형제와 왕후 유(柳)씨를 가르치고 관개(冠盖)는 만조백관, 출포의(出布衣)는 임숙영을 내쫓았다는 뜻이다. 이 시를 본 유희분과 이이첨 등 지목된 썩은 권세가들이 이를 갈았고, 광해군도 분노하면서 체포되었다. 사형이 내렸지만 백사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이 간청하여 극형을 면하고 경원부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머리 풀어 산발한 채 귀양길에 올라 다시 시 한 수를 읊었다. '정부원(征婦怨)'이다.
滴滴眼中淚
盈盈技上花
春風吹恨去
一夜到天涯
방울방울 눈(眼) 속에 흐르는 눈물
다각다각 가지 위에 꽃으로 피었네
봄바람 불어와 이 한을 씻어
밤사이 하늘가로 흩어지거라.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석주의 나라사랑 정신은 꺾이지 않았다. 특히 광해군을 업고 정사를 오로지 하는 유희분을 지목하여 직격탄을 날렸다.
汝是柳希奮耶汝亨富貴
而國事至此國亡測
釜鉞獨不到汝項乎
네가 유희분이냐. 너는 부귀를 누리지만 국사는 이 지경에 이르렀다.
국가가 망하면 너 또한 망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도끼가 네 목에 이르지 않겠느냐.
광해군의 국문장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조정에 직신(直臣)이 없어 궁류시를 썼다고 호언하던 석주는 심한 매질로 당한 골병이 도져 1612년 43세의 짧은 나이로 귀양지에서 객사했다. 다음은 죽기 전에 쓴 '도중(途中)'이라는 제목의 시다.
해 저문 오솔길 외딴 주막집
산이 깊으니 싸리짝도 없구나
닭 우는 새벽 앞길을 물었을 때
단풍 든 누른 잎은 나를 향해 날아드네.
덧붙이는 글 | [붓의 향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