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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말
민족통일애국청년회(이하 민애청)는 2025년 7월 국회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피해자 증언대회를 진행한 바있습니다. 이 후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자세하게 알려질 계기가 더 필요하다는 의지를 모아 국가보안법 피해자 증언프로젝트 '목소리들'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단순 언론 기사에서는 알 수 없었던 피해자들의 아픔과 진실을 찾고 독자들과 공유하려고 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사)양심수 후원회가 함께합니다. 두번째 목소리로는 국가보안법 제정 77년이 되는 날인 2025년 12월 1일 국회의원회관 제2간담회실에서 민형배, 한창민 의원 공동주최로 '북침설 교육 조작사건' 피해자 강성호 선생님의 증언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별도 인터뷰와 강 선생님의 증언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국가보안법폐지 증언대회
국가보안법폐지 증언대회 ⓒ 김태중

책방지기가 된 이유요? 어린 시절 막연한 꿈이었습니다.

교직을 은퇴하고 친구의 권유로 이곳 하동에 내려와 책방지기가 된 지 2년 정도 되었습니다. 하동 책방은 지리산 자락 악양에 있는 작은 책방입니다. 박경리 <토지>의 배경인 평사리 바로 옆에 있는 곳이죠.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지만 그러나 늘 푸른 꿈으로 채워가는 그런 책방이고 싶어요.

<페다고지>를 읽고 품은 교사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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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 땅에 노정삼을 하시는 부모님의 장남으로 태어났어요. 그 시절은 장남을 위해 다른 가족들이 희생을 많이 하던 시기였죠. 저도 가족들의 희생으로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었어요. 제가 대학에 입학한 1981년은 국립사범대학 학비가 되게 저렴했어요. 또 가족들을 위해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바로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다 교사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내가 배운 것을 나눈다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게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죠.

그렇게 경상대학교 사범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영어 선생님을 하려고 했는데 교수님으로부터 일본어 선생님이 되어도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일본어 선생님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돌아보면 저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남들이 안 하는 것에 끌렸던 것 같고. 일본어 선생님이 되기로 한 것도 고향 땅이 아닌 충청북도로 임용을 신청한 것도. '외지인'이라는 지위와 '일본어 수업'이 국가보안법 탄압의 빌미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교사의 꿈을 꾸고 있을 당시 우연히 옛 친구가 운영하는 지역 서점에 방문하게 되었어요. 그때 그 친구가 <페다고지>라는 책을 추천해주면서 "어떻게 교사가 되겠다는 사람이 이 책도 안 읽어 봤냐"고 꾸짖더라고요. 그 책은 당시 사범대생이면 다 읽어봤을 만한 책이었거든요. 그 정도로 저는 평범한 예비 교사였어요. 그때 그 책이 제 인생을 바꾸어버렸습니다.

그 책을 읽고 나서 '아 교사를 하려면 좀 제대로 해야 되겠구나' 그런 고민을 하게되었고 1989년 3월 1일 충청북도 소재 제원고등학교에 발령을 받고부터 자연스럽게 당시 결성을 준비하고 있던 교원 노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전교조 발기인에 참여하면서 학교 생활을 시작했어요. 꿈에 그리던 학교생활은 너무 행복했습니다. 저는 학생들과 재미있게 수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사쿠라라는 단어를 가르치기 위해 벚꽃잎을 칠판에 그리기도 하고 수업 자료도 이것저것 많이 사용하고 교실 밖에도 학생들과 많이 다녔던 것 같아요.

제가 또 초임 교사였지 않습니까? 학생들하고 나이 차이도 그렇게 많이 나지 않다보니 친구처럼 지내기도 했어요. 멀끔하게 생겨서 인기도 꽤나 있었죠. 그러다보니 학생들이 제게 학교에서 겪은 부당한 일들도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해줬어요. 작게는 공부 못한다고 무시하는 학교 분위기에 대한 토로와 자율학습 보충비를 걷는다는가 하는 고충들을 알게 됐죠. 근데 그게 이제 또 하나의 빌미가 된 거죠. 감히 발령받은 지 한 달도 안 된 초임 교사가 교장에게 직접 목소리를 냈거든요. 왜냐하면 저는 학생들한테 좀 떳떳한 교사가 되고 싶었거든요. 그런 양심적인 행동도 허용이 안됐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학생들과 함께한 3개월 간은 정말 꿈만 같은 시절이었죠.

1989년 5월 24일 오전 11시 반

3학년 2반 수업 중이었어요. 수업을 하고 있는데 당시 서무과 직원이 와서 교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곤 "교장 선생님이 잠깐 오시랍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수업 중이니 수업을 마치고 가면 안되냐"고 했는데 아주 급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잠깐만 좀 기다려달라고 하고 교실 문을 나섰어요. 그 교실에 다시 돌아오는데 10년이 걸릴 줄 그때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교장실에 갔더니 교장 선생님이 앉아 있고 소파에 웬 낯선 남자 두 사람이 있더라고요. 두 남자는 자기가 누구인지 소개는 안하고 저를 딱 보더니 "강성호 선생님이 맞으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고선 "학생들한테 참 인기가 많다고 들었다"라고 말을 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잠깐 서에 좀 가야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당연히 반문했죠. 그 서가 경찰서를 말하는 거냐고요. 그랬더니 맞다는 거예요. 저는 너무 순진했어요. 그 순간에도 '아, 다음 시간에 수업이 있는데 어쩌지?'하는 걱정을 했단 말입니다. 연행이냐, 참고인 조사냐, 구속영장이 있냐 이런 얘기를 했어야 했는데. 교장 선생님이 허락을 하셔야 된다고 말하고 교장 선생님을 쳐다보았습니다. 두 남자는 교장이 이미 허락했다고 했어요. 사실은 교장이 저를 고발 했거든요. 지금 생각해도 저는 너무 순진한 교사였던 것 같아요. 저는 그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서에 가자고 하냐고 물으니 두 형사는 학생들 사안을 조사하고 있는데 잠깐 말씀 나눌게 있다고 말 하더군요. 학생들 사안이라고 하니 당연히 협조해야지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교장실을 나서는 순간 두 형사가 양 쪽에서 제 팔을 딱 잡더군요. 그렇게 현관으로 끌려오니 검은색 지프차가 서있었어요. 순간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마침 쉬는 시간이 되어 학생들도 구경(?)을 나와 있었습니다. 애들에게 선생님이 다음 시간 몇 반 수업이니까 그 반 학생들에게 좀 기다리라고 전해주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학생들과 나눈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지프차에 타는 순간 '이 빨갱이 새끼야'라는 욕설과 함께 발길질과 구타가 이어졌습니다. 고개를 숙이라고 윽박지르고 수갑을 채웠습니다. 뭔가 잘못됐다는 게 실감이 났습니다.

제자들에게까지 위증을 강요한 반인륜, 반교육적인 북침설 교육 조작

내리고보니 제천 경찰서 대공과였어요. 그게 1989년 5월 24일 오전 11시 반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상상하지도 못한 일들이 저에게 벌어졌습니다. 저보고 간첩이라고 그러더군요. 무슨 말이냐고 따지니까 '너가 수업 시간에 6.25가 미군에 의한 북침이라고 가르쳤다'고 윽박을 질렀어요. 그런 일이 없다고 하자 '학생들이 진술했다'고 하더라고요. 관련 내용을 진술서에 적으라고 하는 걸 제가 거부했습니다. 그런 사실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어느덧 시간이 지나 9시 뉴스를 하는데 TV에 제가 나오는 거예요. '북침설 교사 구속'이라고. 교장은 저를 '의식화 교육' 교사로 고발했습니다. 비슷한 시간 일부 학부모들이 '의식화 교육' 교사 제명하라고 데모를 했고 충북 교육위원회는 저를 제명했습니다. 이게 다 조사도 받기 전에 일어난 일이에요. 다음날 일간지에도 저는 북침설 교사가 되어있었습니다. 이게 일개 교장 한 명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제 손에는 분필자국이 그대로 묻어 있었고 수업하다 나와서 신발도 그대로 슬리퍼 차림이었는데 몇 시간만에 저는 간첩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음날인 5월 25일 새벽 학생들과 대질 신문이 있었어요. 당시 여학생 몇 명이 "선생님이 그런 말씀(북침설)을 하셨기 때문에 저희들이 들은 대로 이야기하는데 선생님은 왜 부인만 하십니까?"라며 제게 말했습니다. 2명은 제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북침설'이라고만 중얼거리더군요. 저는 그순간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데 더 충격적이었던 건 형사가 계속 저에게 혐의를 인정할 것을 종용하자 한 제자가 "제자가 선생님에게 어떻게 감히 경찰서에 와서까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라고 말하더군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사실 더이상 반박할 기력마저 사라졌습니다. 어떻게 제자에게 위증을 사주합니까? 교육의 기본이 신뢰인데 스승과 제자를 경찰서에서 피의자와 증인 간의 신분으로 만나게 하다니 이런 반인륜적이고 반교육적인 사건이 있습니까?

근데 이 학생이 수업 시간에 결석을 했어요. 'A라는 학생이 강성호의 수업내용을 직접 듣고 B학생에게 말했다, 그리고 A와 B의 대화를 C가 들었다'는게 증언의 핵심인데 B가 그날 결석을 한 겁니다. 그러니 대화 자체가 없던 거였죠. B학생이 해당 수업일에 결석했다는 건 당시 경찰 조서에도 나와있습니다. 그렇지만 공안 당국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고 검사 공소장, 판사 판결문에까지 그대로 올라고요. 이미 결론이 정해져있는 각본이었으니까요.

제가 했던 수업도 '북녘의 산하'라는 당시 <한겨레>에 실렸던 사진집을 이용해 후지산과 백두산을 비교하는 수업이었어요. 쿠바타 히로츠라는 일본인 사진 작가가 찍은 사진집. 한겨레 창립주주들 집에 모두 있던 사진집이었죠. 산들을 비교하며 '여러분은 어느 곳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냐', '우리는 지금 가보지 못하지만 통일이 되면 여러분들은 백두산과 금강산으로 수학여행도 가고 신혼여행도 가면 좋겠습니다' 이 정도 수업을 한게 북침설 교육으로 조작이 된거죠. 2000년에 학생들은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떠났죠. 10년 전에 그저 이런 말을 했다고 저는 간첩이 되었습니다.

사실 또다른 증인이 우리 학생들이잖아요? 대부분의 학생들은 북침설 교육을 듣지 않았다고 말했고 제 탄원서 작성에 600명이 동참해주었어요. 수업거부 운동도 벌였죠. 학생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교장이 각 급 실장들에게 강성호를 감시하라고 시켰다는 증언도 나오게 되었어요. 그때 교감도 제 감시를 많이 했습니다. 제가 살고있는 하숙집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와 하숙집 주인에게 '강성호가 누구와 만나냐' 묻기도하고, 당시에는 교무실에 전화가 교감 자리에 한 대 있었거든요? 저에게 전화가 와서 제가 통화를 하면 옆에서 대놓고 제 통화를 받아 적기도 했습니다. 외지인으로 의지할 사람도 없고 젊은 제가 그들이 볼 때는 탄압의 희생양이 되기에 적합한 타깃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제자들은 운동을 통해 누가 거짓 증언을 했는지 스스로 밝혀냈어요. 이런 내용은 언론에 한 줄도 보도가 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거짓 증언이 발각된 학생들이 학교에 나오지 못했는데 이걸 그 학생들이 협박을 받아 학교에 등교도 못한다는 식으로 보도를 했죠. 사실 저를 간첩으로 몰았던 주요 일간지들은 제가 재심에서 승소했을 때 역시 보도 한 줄 실어주지 않았습니다.

1989년 5월 28일 전교조가 공식 출범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두 분의 선생님이 비슷한 시기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어요. 안기부는 소위 '북침설 교육 사건'을 대국민 홍보용으로 사용했고 문교부 문건에도 제 사건이 예시가 되어 전교조 탄압에 쓰였습니다. '의식화 교육하는 교사들이 만든 전교조는 문제가 많다' 이런 논리를 위해 조작된 사건이던거지요. 국가보안법은 이렇게 국가를 지키는 법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정권의 칼로 쓰입니다. 그로 인해 전교조가 불법화되고 많은 교사들이 학교 밖 교사로 해직되었죠.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저도, 전교조도 참 힘든 시기였습니다. 2007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 보고서를 통해서 당시 안기부가 전교조를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가보안법 사건을 이용했다는게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2차 공판에서 '진실 정의'를 펼쳐보이는 강성호 선생님(강성호 제공)
2차 공판에서 '진실 정의'를 펼쳐보이는 강성호 선생님(강성호 제공) ⓒ 제천신문

진실과 정의를 세우기 위해 투쟁하다

그렇게 구속이 되니 국가보안법 피의자니까 면회도 잘 안되더라고요. 감옥에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어떻게 진실을 밝혀야 하나. 스승과 제자를 피고와 증인으로 만나게 한 거짓 법정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그렇게 2개월이 지나 1심 첫 공판에 출석을 앞두고 제 의지를 담은 메시지를 전달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 간수에게 사정 사정해서 볼펜 심을 하나 몰래 얻었습니다. 그리곤 새벽을 지새우며 손바닥에 '진실', '정의'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이게 들키면 안되잖아요. 그래서 수갑이 채워질 때도 주먹을 꽉쥐고 펴지 않았어요. 손에는 땀이 엄청 났어요. 그러니까 또 '아, 이게 지워지면 어떠나'하는 걱정도 들었답니다. 그리곤 법정에 들어서는 순간 손바닥을 쫙 펼쳤습니다. 다행이 지워지지 않았더라고요. 그떄나 지금이나 저는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마음으로 버텨왔던 것 같습니다.

그해 10월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 선고를 받고 이듬해 1월 2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석방됐어요. 수감 8개월 만이었죠. 그때 청주교도소에서 나왔거든요. 그래서 청주시에 있는 식당에서 조촐하게 석방 위로 겸 식사 자리가 있었는데 아버님이 진주에서 올라오셨어요. 그 자리에서 아버님이 했던 말이 참 기억에 남아요. "아 오늘은 기쁜 날이지만 한편으로는 서글프다. 내가 진주 중학교를 다녔는데 그 똑똑했던 중학생 동기생들은 다 죽었다. 빨갱이로 몰려서. 나는 덜 똑똑해서 살아남았다. 그런 세월이 40년이 지나 내 아들이 빨갱이로 몰려있는데 이게 그냥 기쁠 수가 있냐."

우리 현대사가 이런 역사잖아요. 제가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가다보니 저희 가족에게는 빨갱이 집안이라는 손가락질이 쏟아졌습니다. 고향이 경상도라 더 심했다면 심했겠지요. 저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오히려 더 의연해졌지만 개인적으로 너무 가슴 아픈 시기이기도 했어요. 아버님은 제가 잡힌 뒤에 몸져 누우셨고 오래 사시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제게는 당시 대학생이었던 남동생이 있었어요. 제 동생은 민가협 어머님돌과 해직 교사 가족들과 서울 시내, 지하철을 다니며 전교조 탄압에 대해 알리고 형의 억울함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냈어요. 그러나 경찰에 끌려가고 난지도같은데에 버려지고. 제 동생은 이 과정에서 상처를 많이 입은 것 같아요. 결국 가출을 했어요. 저는 석방되고 전교조 활동을 하느라 고향에 자주 가지도 못하고 동생을 잘 챙기질 못했어요. 그러다 제 동생은 진주 남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제가 그 동생의 시신을 화장하고 남강에 뿌렸습니다. 이 생각만 하면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눈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저 때문에 아버님과 동생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까요. 그렇지만 제가 더 용기를 내고 또 살아있는 자의 몫을 해야 되겠다는 그런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도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어요. 그 중에 한 사람이 같은 교사였던 제 아내입니다. 제가 감옥에 있을 때 썼던 편지들을 밖에서 읽어봤나봐요. 그래서 힘이 되고 싶다고 제게 프러포즈를 했어요. 저는 당시 국가보안법으로 해직된 교사였지만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전교조에서 상근활동가로 일했어요. 활동비는 고작 15만원이었죠. "마음은 고맙지만 내 상황이 어렵다"고 솔직히 말했죠. 그랬더니 제 아내가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학교 밖에서, 나는 학교 안에서 참교육을 위해 활동하면 되잖아요"라고요. 제 아내는 저와 함께 싸워온 동지예요. 국가보안법 때문에 많은걸 잃기도했지만 사랑은 얻었다고 얘기하고 다녀요.

 국가보안법폐지 증언대회
국가보안법폐지 증언대회 ⓒ 강성호

재심 승리, 진실은 밝혔지만

아내 뿐 아니라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1999년 9월에야 복직이 되었습니다. 다른 해직교사들은 90년대 중반에 이미 복직이되었는데 저는 국보법 사범이잖아요. 교육청 앞에서 농성하고 단식하고 할 수 있는 건 다했죠. 결국 특별채용 형식으로 복직이 됐지만 다시 초임교사가 돼버렸네요. 해직된지 10년 4개월 만이었죠.

이제 다시 교단에 섰으니 진실 규명이 목표가 된 거죠. 근데 전 이미 최종 유죄 판결을 받았으니 결국 진실을 밝히려면 재심을 가야죠. 근데 재심은 쉽게 열리지 않잖아요. 그래서 사회적 분위기를 많이 봤죠. 그렇게 때를 기다리다 2019년 문재인 정권 당시 문무일 초대 검찰총장이 과거 시국 공안 사건에 대해 재심을 신청하겠다는 기사를 봤어요. '아 지금이 좋은 시기구나'라는 생각이 딱 들었죠. 여기서 말하는 좋은 시기는 국가 권력이 시민들의 눈치를 볼 때를 말해요. 전교조 창립 30년에 딱 맞춰 2019년 5월 28일에 재심을 신청했습니다. 전교조가 용공집단이라고 조작하기 위해 나를 희생양 삼았다는걸 상징적으로 보여줘 나와 전교조의 명예를 회복하려고요.

재심이 열렸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같이 근무하고 있던 후배동료 교사들이 안부의 말을 전해주더라고요. 그런데 재심이 국가보안법 사건이라는 게 알려지고나서 선생님들에게 탄원서를 작성해달라고하니 쉽사리 써주지 못하더란 말입니다. 참 세월이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가보안법의 존재는 강력하구나 느꼈습니다. 내가 잘 싸워온 게 맞는지 씁쓸하기도 했죠. 국가보안법 낙인은 인간관계도 공동체도 훼손해버립니다. 낙인이 찍히는 순간 그동안 잘 지내오던 동료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저를 보게 되는 거죠. 꼭 재심에서 승소해서 국가보안법의 문제점을 더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가장 괴로웠던 건 30년 전 조서를 다시 읽는 과정이었죠. 그날의 아픔이 다시 찾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또 이제 50대가 된 위증한 제자들을 다시 만나는 것도 힘든 순간이었어요. 사실 그 애들도 분단의 희생양이에요.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학교에서 이용하기에 쉬운 학생들이었어요. 그 학생 중 한 명이 재심에 증언을 거부했어요. 비록 재판장에서 진실을 말하진 않았지만 동기에게 메시지를 보내서 '그 당시에 담임 선생과 교장 그리고 교감에게 거짓 진술을 강요받았다, 강 선생님 가족이 희생되신 걸 최근에야 알았다, 증언이 그렇게 큰 일이 될 줄 모르고..... 나도 당시에 자살 시도하고 그랬다'라고 말했더라고요. 저는 그 학생들도 피해자라고 생각해요. 저는 제자들을 용서하고 싶습니다.

1989년 조서에서도 나왔듯 결석한 학생의 증언은 근거가 없죠. 그런데 검찰은 30년 전 공안 검찰 선배들이 했던 공소 내용, 구형을 그대로 했어요. 사람들은 놀라던데 전 놀랍지 않았어요. 공안권력은 뿌리 깊습니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이 그대로 있잖아요? 법체계가 남아있는데 그들이 움찔이라도 할까요?

그래도 2021년 9월 2일, 32년 만에 재심에서 승소했고 무죄가 됐습니다. 주변에서 축하한다는 말 많이 하더라고요. 근데 이게 축하받을 일인가요? 저는 별로 기쁘지 않았어요. 재심에서 승소한다고 생을 마감한 내 아버지, 내 동생이 살아 돌아오나요? 제가 겪은 32년 간의 모진 인생이 없던 일이 되던가요? 아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국가보안법이 버젓이 살아있죠. 정권이 바뀌고 조금 온화한 분위기가 되더라도 국가보안법 사건은 언제든 터질 수 있습니다. 저는 소위 운동권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었지만 저같은 사람도 국가보안법에 의해 가족을 잃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전교조 용공몰이에 희생양이 되었고요. 평범한 사람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 국가보안법 탄압이라는걸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살았잖아요. 우리 역사를 보면 국가보안법의 덫에 걸리면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죠.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가신 분들이 많아요. 제게도 아픔이 있지만 그런 분들에 비할 바는 못됩니다. 살아 남았으니까. 살아 남은 사람의 도리로서 국가보안법을 폐지 시키고 정의를 세우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남은 삶에 최선을 다해야겠죠. 하동에서 책방을 하며 사람과 사람을 잇고 지역과 도시를 이으며 평화통일을 위해 살아가려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세번째 목소리는 2026년 2월 윤석열 정권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 신동훈 씨를 모실 예정입니다.

아울러 2025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 제정일에 맞추어 민형배, 김준형, 윤종오 의원 등 30여 명의 의원들이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극우 세력들이 법안 의견 등록에 반대의견의견을 쏟아내며 여론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기사를 읽고 법안에 소중한 의견을 남겨 시민의 목소리가 왜곡되지 않게 힘 모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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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al.assembly.go.kr/napal/search/lgsltpaSearch/view.do?lgsltPaId=PRC_X2Y5W1X1S1T7R1Q0Q1O5P3X6Y1W7W0


#국가보안법#강성호#간첩조작#전교조#폐지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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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피해자 증언대회 '목소리들'

김태중 (ktj6288) 내방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바라는 청년입니다. 행동하는 청년회, 민족통일애국청년회 사무국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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