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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대종교 활동(전시물 사진 재촬영)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대종교 활동(전시물 사진 재촬영) ⓒ 박상준

1900년대를 전후하여 나라의 운명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황실은 명성황후와 대원군으로 갈리어 권력투쟁의 장(場)이 되고 지도층은 청국에 기댄 위정척사파와 일본을 등에 업은 개화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국정은 세도정치로 부패타락하고 백성들은 가렴주구에 시달려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천주교가 들어와 반상의 신분질서를 바꾸고자 하였지만 정부의 혹독한 탄압으로 수많은 순교자를 낸 채 지하에 숨어들었다. 동학농민군이 마지막 몸부림을 쳤지만 일본군이 들고온 신식 무기에 녹두꽃처럼 떨어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이었다. 백성들은 육체적으로 시달리고 정신적으로 황폐화되었다. 이 즈음 이땅에서는 각종 민족종교가 창도되거나 부활하여 신생(新生)의 횃불이 되거나 혹세무민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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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시천교·청림교·상제교(上帝敎)·수운교·경천교·천도명리교(天道明理敎)·제우교(濟遇敎)·백백교·태을교(太乙敎)·보천교·단군교·대종교·원종교(元宗敎)·원불교·증산교 등이 개인의 치병에서 영혼구제, 국난극복에 이르기까지 제각각의 사명을 제시하면서 창도되었다.

민족종교 중에는 본래의 목표대로 정진하는 교단이 있었는가 하면 상당수는 변질되어 친일 매국의 앞잡이가 되거나 국난기에 편승하여 혹세무민을 일삼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종교 중에서 대종교는 가장 격렬하고 줄기차게 일제침략자들과 싸웠다. 대종교의 전신인 단군교의 전통과 뿌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단군교는 단군조선시대부터 명칭을 달리하면서 연면한 전통으로 이어졌다. 부여에서는 대천교, 예맥에서는 무천, 마한에서는 천군, 신라에서는 숭천교, 고구려에서는 경천교, 발해에서는 진종교, 고려에서는 왕검교, 만주에서는 주신교, 기타 다른 지역에서는 천신교라 불리면서 개국주(開國主)인 단군을 받들었다.

단군숭배사상을 기초로 하는 단군교는 옛날부터 단군을 시조(始祖), 국조(國祖), 교조(敎祖)로 신봉하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단군교는 사찰 본당과 대웅전의 뒷켠 삼신각에서 간신히 잔명을 유지하고, 유교가 국교가 되면서는 공자나 주자에 밀려났다. 기독교(천주교)가 유입되면서 '우상'으로 전락되고 일제강점기에는 말살의 대상이 되었다.

단군(교)의 존재가 새롭게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 몽골제국에 맞서 싸우면서 내부적으로 민족의식·민족적 일체감이 형성되면서부터이다. 안으로는 무인정권의 폭압에 시달리고 밖으로는 세계를 제패한 몽골의 침략으로 국토가 쑥대밭이 된 민족수난기에 내적인 민족통합의 정신적 일체감이 단군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단군을 국조로 하는 일연 선사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편술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민족적인 위기를 국조를 중심으로 극복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몽골제국이 13세기 초에서 중엽까지 80여 년 동안 고려의 정치에 간섭할 때 나타난 단군교가 20세기 초 일제의 침략으로 다시 국권이 위태로워지면서 국권회복의 구심체로서 부활하였다. 몽골침략 이후 7백여 년간 단절되었던 단군교가 1910년 8월 5일 나철이 대종교로 교명을 개칭하면서 국난극복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셈이다.

단군교가 대종교로 명명한 날을 중광절이라 한 것은 단군신앙의 부활을 뜻한다. '중광'(重光:거듭 빛남)이란 국교(國敎)의 계승을 분명히 한 것이다.

대종교가 중광을 계기로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강하게 표명하면서 일제의 가혹한 통제와 탄압이 따랐다. 일제는 대종교를 항일구국운동의 비밀결사체로 인식하면서 치안경계 대상으로 삼아 탄압했다.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된 대종교는 1911년 7월 21일 백두산 기슭의 화룡현 청파호로 총본사를 옮겼다.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사는 청파호에 총본사와 대종교 경각 등을 짓고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청파호를 근거지로 삼아 4도본사를 각기 청호·상해·서울·소왕청에 두고, 조선·중국·러시아·연해주 등 조선족이 사는 곳에 학교를 세워 포교활동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조선총독부가 1915년 10월 1일 이른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대종교에 포교금지령을 내리면서 공식적으로는 해방이 될 때까지 국내 포교활동은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대종교가 민족정통사상을 계승하면서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자 각지의 애국지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대종교 중광의 주역인 나철은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라는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의 정신으로 독립운동과 단군신앙을 일체화하였다. 이에 따라 대종교에서는 일제의 조선사 왜곡에 맞서 단군에 대한 서적을 대량 출간하였다.

1914년에 <신단실기>와 <신단민사>의 발간을 시작으로 1922년에 <신고강의>, <신리대전>, <회삼경>, <신사기>, <조천기>, <신단민사>, <신가집>을 간행하였다. 1923년에는 국문으로 된 <현토신고강의>, <신리대전>, <신사기>, <화삼경>, <신단민사> 등을 발간하고, 이와 함께 <신고강의>, <종라문답>, <신가집>, <배달족강역형세도>등 교적을 속속 간행하였다.

대종교의 각종 사서 간행은 1930~1940년대에도 이어져서 <삼일신고>, <신단실기>, <오대종지강연>, <종문지남>, <한얼노래> 등을 펴내어 동포들을 교육하고 민족혼을 유지하였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걸쳐 대종교에는 독립운동계의 거물들이 참여했다. 신규식·박은식·윤세복·신채호·김두봉·정인보·장지연·유근·김교헌·서일 등 당대의 민족사학자 대부분이 대종교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무장투쟁의 영웅 홍범도 장군도 참여하고 사서 편찬을 지원하였다.

대종교 계열의 독립운동가 신규식은 나라 망한 원인을 "첫째는 선조들의 교화와 종법을 잊어버렸고, 둘째는 선민(先民)들의 공열(功烈)과 그 이기(利器)를 잊어버렸고, 셋째는 제 나라의 국사를 잊어버렸고, 넷째는 나라의 치욕을 잊어버리게 되었으니 이처럼 잊어버리길 잘하고 보면 그 나라는 망하게 마련이다."라고 통분하면서 <한국혼>을 지었다. 대종교의 '역사지키기' 정신의 일환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가장 먼저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1918년 음력 11월 만주와 해삼위를 중심으로 당시 해외에 나가 있던 저명인사 39명이 서명한 '대한독립선언서'이다. '무오독립선언서'로도 불리고, 대종교 인사들이 다수 참여한 까닭에 '대종교독립선언서'로도 불리는 독립선언서다.

여기에는 김동삼·김교헌·박찬익·김학만·김좌진·박은식·신채호·윤세복·정재관·이범윤·신규식·이시영·이상룡·이학만·유동열·이광·안정근·이대위·최병학·이동휘·박용만·이동녕·조소앙·여준·손일민 등이 서명했는데 상당수가 대종교 계열의 인사들이다.

대종교선언서는 먼저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과 자립국임을 선포하고 우리 대한은 타민족의 대한이 아닌 우리 민족의 대한이며, 우리 한토(韓土)는 완전한 한인의 한토이니, 우리 독립은 민족을 스스로 보호하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지 결코 사원의 감정으로 보좌하는 것이 아님을 선언하였다.

선언서는 일본의 병합수단은 사기와 강박과 무력폭행 등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라고 촉구했다. 또 2천만 동포들에게 국민된 본령이 독립인 것을 명심하여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을 촉구하였다.

조소앙이 집필한 이 선언서의 특징은 한국병탄의 무효를 선언하고,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게 할 것"을 촉구하였다는 점이다. 대종교독립선언서를 필두로 2·8독립선언서, 3·1독립선언서 등 독립선언서가 봇물처럼 쏟아지면서 항일투쟁의 절정을 이루었다.

대종교도들은 동포교육과 민족혼의 계승운동에만 만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무장독립단체를 조직하고 항일무장투쟁에 직접 참가하였다. 대종교 지도자 중 서일·홍범도·김좌진·윤세복·김혁·리상용 등 독립운동지도자들은 북로군정서·대진단·대한독립단·흥업단 등을 조직하고 다른 무장단체와 연합하여 청산리대첩을 이루었다. 일제강점기에 최대의 전승인 청산리대첩은 대중교도들이 주축을 이루어 낸 쾌거였다.

대종교가 무장투쟁의 전개과정에서 보여준 살신성인·선공후사·진충보국·일기당천의 정신속에는 단군을 국조로 하는 민족정통의 종교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안화춘(연변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교수는 대종교의 항일구국운동을 크게 세 가지로 종합하였다.

첫째는 조선인의 민족정신, 단군을 중심으로 한 민족정신을 배양하고 일제의 문화침략에 대항하여 조선민족의 독립을 이룩하여 이상국가인 배달국가를 재건하려는 것.

둘째는 대종교도가 주체가 되어 반일 무장단체를 조직하여 일제와 직접 무력항쟁을 전개한 것.

셋째는 일제식민지통치에서 민족사관을 정립하여 조선역사의 맥을 이은 것.

덧붙이는 글 | [붓의 향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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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의 향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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