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발로 세계를 제패하다 특별전두발로 세계를 제패하다 특별전 입구. 전시는 12월 28일까지 이어진다. ⓒ 최한결
연말이면 늘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인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후회하기도 하고, 다가오는 새해를 어떻게 맞이할지 기대하기도 한다. 올해는 꼭 매일 달리겠다고 다짐했지만 최근 발에 작은 부상을 입으며 뛰지 못하고 있다.
달리기는 작은 예시로, 그 멈춤 속에서 내년에 대한 비슷한 고민이 쌓여가고 있다. 지난 6일 우연히 찾은 국립중앙박물관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 특별전은 흔들리던 생각을 다시 단단하게 만들어줬다.
이 전시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이야기부터 보스턴 마라톤에서 활약한 제자들,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화 봉송의 순간까지 이어지는 감동의 장면을 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종종 찾던 내게, 손기정이 올림픽 부상으로 받은 그리스 청동 투구는 기증관에서 늘 마주하던 익숙한 유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특별전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그 투구를 다시 보러 가는 길이 더 기대됐다.
AI로 구현된 장면, '손긔졍' 한글 서명

▲두발로 세계를 제패하다 특별전AI로 구현된 보스턴 마라톤의 장면, 팀 코리아와 함께 달리는 체험을 할 수 있다 ⓒ 최한결
기증관에 들어서자 커다란 대형 화면에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기정의 모습과 보스턴 마라톤의 제자들이 나를 맞이했다. 화면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보스턴 마라톤의 한 순간이 구현돼 있었다. 앞에서는 'KOREA'를 등 뒤에 단 선수가 달리고 있었고, 양옆으론 관중들이 손을 흔들고 함성을 보내고 있었다. AI 기술로 재연한 이 화면 속에서 나는 그들과 함께 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어진 전시관의 내용은 여러 차례 본 익숙한 장면들이 놓여 있었다. 1936년 8월 9일,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음에도 웃을 수 없었던 손기정의 모습. 일장기를 지운 한국 신문사의 보도까지,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지만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손기정의 한글 서명전시관에서 만날 수 있는 손기정의 한글 서명, 1936년 8월5일 날짜가 눈에 띈다. ⓒ 최한결
얼마 전 서울역의 한 전시에서 본, 손기정이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서울역에서 베를린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는 설명이 떠올랐다. 희망도 꿈도 없는 암흑의 시대, 손기정이 선택한 것은 오로지 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 정상에 올라서고 맛본 것은 끝없는 좌절감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손기정은 포기하지 않았다. 금메달 수상 이후 수많은 축하객을 만나는 동안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임을 알리기 위해 '손긔졍'이라는 한글 서명을 하고 지도를 그려줬다. 전시에서 1936년 8월 15일 그가 남긴 서명을 볼 수 있었다. 그로부터 9년 뒤 조국은 광복을 맞았다.
월계관과 증서, 청동 투구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증서베를린 올림픽 증서. '키테이 손'이라는 이름, 일본 국적으로 표기되어 있다. ⓒ 최한결
주 전시 공간에는 베를린 올림픽 월계관과 증서, 올림픽이 끝난 뒤 50년 만에 주인에게 돌아온 부상 '그리스 청동 투구'가 함께 전시되어 있다. 증서에는 '키테이 손'이라는 이름과 함께 일본 국적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전시관 중앙에 한글 서명을 배경으로 위풍당당히 전시된 청동 투구는 일본 이름이 적힌 증서와 대비됐다. 기원전 6세기에 제작된 이 투구는 오랜 세월에도 여전히 단단했고 마치 손기정의 꺾이지 않는 의지와 닮아 있었다.

▲손기정의 그리스 청동 투구손기정이 올림픽 금메달 부상으로 수여받은 그리스 청동 투구(가운데)와 월계관(왼쪽) ⓒ 최한결
전시는 보스턴 마라톤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졌다. 'KOREA팀 세계를 제패하다'라는 제목으로 손기정 감독과 1947년 서윤복의 우승, 1950년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2·3위를 석권한 이야기가 써 있었다.
마지막에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70대의 나이로 성화를 들고 경기장을 달리던 손기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좌절에서 희망의 불꽃을 피어 낸 일련의 이야기들 속에, 나는 감히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희망의 길, 다시 달릴 힘을 얻다

▲전시관 한 켠의 문구 ⓒ 최한결
전시관 벽 한켠에 적힌 문구 앞,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라를 가진 민족은 행복하다. 제 나라 땅에서 구김살 없이 달릴 수 있는 젊은이는 행복하다. 과연 그들을 막을 자가 누구인가." – 손기정 자서전 중
끝없는 억압과 좌절의 반복 속에서도 '손긔졍'이라는 서명을 남긴 손기정. 수년 뒤, 제자들이 세계를 제패했고 이름조차 지키기 어려웠던 조국은 올림픽을 열었다. 그 여정을 보고 나니 내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희망의 길 체험 공간, 관람객들이 남긴 메시지가 트랙을 힘차게 달린다 ⓒ 최한결
전시의 마지막은 '희망의 길'이라는 체험 공간이었다. 내 감정 상태를 선택하면, 그에 맞는 손기정과 팀 코리아의 명언들이 나타난다. 관람객은 자신의 희망과 다짐을 남길 수 있고, 그 문장들은 트랙 모양의 화면에 표출된다. 나는 간단히 '힘내자, 화이팅'이라는 문구를 작성했다. 다른 관람객들의 메시지와 함께 내 다짐이 트랙을 달리고 있었다.
왠지 다가올 새해를 다시 달려나갈 힘을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구김살 없이 달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막을 자가 누구인가!
지난 7월 시작된 이 전시는 오는 12월 28일 막을 내린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찾는 누구나 예약 없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새해를 약 2~3주 남긴 지금, 잠시 들러 '다시 달릴 마음'을 얻어보는 건 어떨까?

▲희망의 길 체험 공간, 힘내자 화이팅이라는 간단한 다짐을 적었다. ⓒ 최한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