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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7 15:41최종 업데이트 25.12.07 15:41

프랑스 도시 표지판에 새겨진 공동의 기억

일상 속에 함께 스며든 성인의 이름들... 지워지지 않는 시간의 기록

나는 매일 '성인의 이름'을 밟으며 작업실로 향했다. 생미셸(Saint-Michel), 생드니(Saint-Denis), 생폴(Saint-Paul), 생제르맹(Saint-Germain). 지도 위에는 끝없이 '생(Saint)'이 반복되었다. 프랑스는 종교와 국가를 분리한 세속주의 공화국이다. 20살 어린 나이에 프랑스에 도착했던 때는 길마다 붙은 '성스러운(Saint)'이란 말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학식이 깊어지면서 나는 부르봉 왕조 시절 붙은 길의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며 사람들의 문화 인식 깊이 남아있음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공공 기관에서는 종교적 상징이 철저히 배제되는데, 정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거리에는 수백 년 전 성인의 이름이 아무렇지도 않게 남아 있었다.

미술관에서 성인은 대개 '과거의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루브르에 걸린 수많은 성화 속 성인들은 더 이상 기도의 대상이 아니라 명암과 구도, 안료의 역사로 해석된다. 신은 미술사 속에서 문학과 지식의 산물로 빛을 발하며, 성인은 교과서 속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도시의 거리에서는 그 이름들이 여전히 가장 현실적인 좌표로 기능하고 있었다. "생미셸(Saint-Michel)에서 만나자", "생드니(Saint-Denis)까지 걸어가자"는 말 속에서 성인은 더 이상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약속의 기준점이 되어 있었다.

파리의 표지판 프랑스 파리 4구의 'RUE DU PONT LOUIS PHILIPPE' 표지판, 루이 필리프 1세 는 '시민왕'으로 불리던 왕이다.
파리의 표지판프랑스 파리 4구의 'RUE DU PONT LOUIS PHILIPPE' 표지판, 루이 필리프 1세 는 '시민왕'으로 불리던 왕이다. ⓒ 정수진

성인이 이름이 지명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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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도시는 대부분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프랑스에서 성인의 이름이 지명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로마 제국 말기, 기독교가 공인되고 본격적으로 확산되던 시기였다. 4세기 이후 프랑스 지역, 당시의 갈리아(Gaule)에는 수많은 순교자와 성직자의 무덤 위에 교회와 수도원이 세워졌고, 사람들은 그 공간을 성인의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기념이 아니라, 불안정한 시대 속에서 '신의 보호가 깃든 장소'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적 약속에 가까웠다. 성인의 이름은 신앙의 표식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서로를 찾고 공간을 구분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좌표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성인의 이름이 지명으로 정착된 가장 대표적 사례로는 오늘날의 '생드니(Saint-Denis)'가 꼽힌다. 이곳은 3세기 파리 지역에서 순교한 성 디오니시우스(Saint Denis)의 무덤 위에 7세기경 대성당과 수도원이 세워지면서 그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이 장소는 프랑스 왕들의 무덤이 모인 왕실 성지가 되었고, '성인의 이름을 가진 도시'라는 전통은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투르의 '생마르탱(Saint-Martin de Tours)', 파리 인근의 '생제르맹(Saint-Germain-des-Prés)' 역시 같은 흐름 속에서 형성된 지명이었다. 성인의 이름은 신앙과 정치, 공동체 정체성이 동시에 겹쳐지는 방식으로 프랑스 도시의 뼈대에 새겨졌다.

정치적 장치로 기능한 이름들

왕들은 자신들의 통치 정당성을 신의 권위와 연결시키기 위해 주요 수도원과 성당에 후원했고, 그 과정에서 성인의 이름을 가진 도시는 정치적 중심지로 성장했다. 생드니는 프랑스 왕실의 매장지가 되었고, 생레미(Saint-Remi)는 랭스 대성당과 함께 왕의 대관식 전통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성인의 이름은 단순한 종교적 표식이 아니라, 왕권이 신성한 질서 안에 있음을 보여 주는 정치적 장치로 기능했다. 성인의 이름이 붙은 도시는 곧 왕의 도시이자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왕과 귀족의 이름이 붙은 광장과 거리들은 대대적으로 개명되었음에도, 성인의 이름을 지닌 지명들은 상당수 유지되었다. 혁명 정부는 종교를 권력에서 분리하려 했지만, 성인의 이름으로 굳어진 도시의 명칭까지 한꺼번에 지워버리지는 않았다. 이미 수백 년 동안 생활 언어로 굳어진 지명은 행정적 개입만으로 쉽게 대체할 수 없는 '공동의 기억'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인의 이름은 더 이상 신앙의 명령이 아니라 주민들이 길을 부르고 삶을 조직하는 실질적인 언어로 기능하고 있었다. 혁명은 신의 권위를 무너뜨렸지만, 시간 속에 퇴적된 이름까지 함께 제거하지는 못했다.

L'Impasse Cottin Maurice Utrillo, (1883, France - 1955, France), L'Impasse Cottin
L'Impasse CottinMaurice Utrillo, (1883, France - 1955, France), L'Impasse Cottin ⓒ Centre Pompidou

나는 어느 날 생드니 거리를 걷다가 문득 한 장의 그림을 떠올렸다. 몽마르트의 골목 오르막길을 그린 위트릴로(Maurice Utrillo, 1883-1955)의 거리 풍경이었다. 몽마르트의 골목길들은 사르쾨르 대성당을 가기 위한 중요한 길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 속 성당으로의 길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일상의 배경이었다. 신성함은 퇴색되고, 대신 볼품 없이 낡은 벽과 축축한 돌 바닥, 텅 빈 하늘이 공간을 채운다. 그것은 종교의 상징이라기보다 도시의 현실이다. 지금의 파리 거리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길의 이름도 천천히 변화를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의 도시와 지명은 성인의 이름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성인의 이름에서 몇 블록만 이동하면 볼테르, 루소, 위고 같은 계몽 사상가와 예술가의 이름이 등장한다. 성인과 철학자, 종교와 이성, 중세와 혁명이 같은 지도 위에 뒤섞여 있다. 프랑스의 거리는 단일한 사상으로 정리되지 않은 채, 서로 다른 시대의 가치들이 그대로 겹겹이 퇴적된 지층 구조처럼 각자의 색을 자랑하듯이 역사의 남은 위인이라면 누구라도 그 자국을 지도에 남겼다.

한국 사회에서 공공 공간에 특정 인물의 이름이 붙거나 혹은 철학자의 이름이 붙으면 그것은 곧 갈등과 논쟁의 대상이 되곤 한다. 2023년에 가열된 '홍범도 장군로' 논쟁처럼 충돌도 자주 일어난다. 반면 프랑스에서의 공간 이름은 이미 갈등을 벗어난 '오랜 표식'처럼 기능하고 있었다.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시간이 쌓인 기호에 가까웠다.

예술의 운명도 이와 닮아 있었다. 한때 신을 위해 봉사하던 성화는 미술관에 들어오면서 신앙을 벗고 예술이 되었다. 거리의 성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름들은 종교적 명령이 아니라 도시가 지나온 시간을 표시하는 좌표로 변해 있었다. 프랑스의 세속주의는 종교를 완전히 삭제하지 않았다. 대신 현재의 권력에서 종교를 밀어냈고, 과거의 흔적으로는 남겨 두었다. 공공정책과 학교에서는 종교가 철저히 배제되지만, 공간과 지명 속에서는 종교가 기억의 형태로 살아 있었다. 신은 행정에서 사라졌고, 성인은 지명으로만 남았다.

피에르 카우프만 광장 표지판 피에르 카우프만 광장의 표지판이다. 그는 레지스탕스로서 프랑스의 유대인 제도를 이루었다. 바로 옆 도로에는 프랑스의 왕이었던 루이 필리프 1세의 도로가 보인다.
피에르 카우프만 광장 표지판피에르 카우프만 광장의 표지판이다. 그는 레지스탕스로서 프랑스의 유대인 제도를 이루었다. 바로 옆 도로에는 프랑스의 왕이었던 루이 필리프 1세의 도로가 보인다. ⓒ 정수진

신의 이름에서 도시의 언어로

나는 작업실로 향하는 길에서 무수히 많은 '성인 (Saint)'의 이름을 지나쳤다.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신의 이름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오래된 문장처럼 느껴졌다. 예술이 신의 소유에서 인간의 해석으로 넘어왔듯, 성인의 이름도 신앙의 영역에서 생활의 언어로 이동해 있었다.

프랑스의 거리가 성인의 이름을 계속 부르는 이유는 신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함부로 지우지 않겠다는 사회의 태도에 더 가까워 보였다. 이 도시는 혁명을 통해 왕과 특권, 신의 권위를 무너뜨렸지만, 모든 흔적을 말끔히 삭제하지는 않았다. 신앙은 사적인 영역으로 물러났고, 그 대신 기억은 공공의 공간에 남았다.

거리의 표지판은 더 이상 종교의 표식이 아닌 추억과 기록의 장소이다. 그것은 신의 위대함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닌, 이 도시가 겪어온 시간의 자국으로 다가온다. 프랑스의 시민왕 '루이 필리프 길'은 프랑스의 유대인 제도를 이끌어낸 레지스탕스 피에르 카우프만의 이름을 딴 광장 앞에 존재한다.

오늘날 프랑스의 길 위에서는 왕권도 국적도 지위도 더 이상 차별을 이루지 않는다. 그들은 지표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거리는 여전히 성인과 위인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그 이름은 더 이상 이상만을 향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시와 선조들이 지나온 역사가 프랑스인들에게 조용히 남기는 하나의 문장이고, 지워지지 않는 시간의 기록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매일 밟고 지나가는 기억의 바닥이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자는 프랑스 파리 ESBAMA 의 국가 조형예술가 자격 취득및 졸업하였으며, 파리 1대학 판테옹 소르본 에서 미술 석사졸업, 박사 이며, 국제 철학저널 Mutatis Mutandis의 논문 심사자이다.


#종교#역사#미술사#프랑스#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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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형 예술학 rechercher, (MAESBA, 소르본 박사수료) - 현대미술가 - 미술심리상담사 - 국제 철학저널의 논문 심사자 - ENA 자격으로 유럽기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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