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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 나 역시 장난감에 환장하던 꼬마였다. TV에서 새로운 만화영화가 방영할 때마다 완구업체에서는 어김없이 만화 속 캐릭터 장난감을 출시했고, 그때마다 동네 문방구 앞을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장난감을 사줄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며, 길바닥에서 부모님 소매를 붙들고 울며 떼쓰던 기억이 생생하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자연스레 장난감에 대한 흥미도 사라졌다. 어릴 적 그렇게 들락날락하던 완구 코너도 성인이 된 뒤로는 갈 일이 없어졌다. 언제 한 번 장을 보러 대형마트에 갔다가 피규어숍을 지나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이런 건 애들이나 갖고 노는 장난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애들 장난감이라고만 생각했던 피규어 가격이 수십만 원에 이르는 걸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위인 피규어' 수집가가 된 사연
그랬던 나였건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집안 곳곳에 피규어들이 전시돼 있다. 마니아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방 책상과 서가, 심지어 회사 사무실 책장에도 피규어들을 놓아두고 있다.
피규어를 애들이나 갖고 노는 장난감 정도로 생각하던 내가 어쩌다 수집가가 됐을까. 사실 내가 모으는 피규어들은 일반적인 것들과는 다르다. 보통 피규어라 하면 영화나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생각하겠지만, 내 방을 장식한 피규어들은 모두 한국의 역사적 위인들을 형상화한 것이다.

▲서울의 한 국궁장(공항정)을 배경으로 촬영한 태조 이성계 피규어 ⓒ 김경준
대표적으로 2021년 크라우드펀딩으로 구매한 '태조 이성계 피규어'를 들 수 있다. 이성계 피규어는 말 위에서 활을 쏘는 신궁(神弓)의 모습을 재현한 형태다. 전통활쏘기(국궁) 수련자로서, 이성계에 대해 남다른 애정과 존경심을 가진 나에게 이 피규어는 유달리 애착이 간다.
사실 내가 가장 열심히 수집하는 피규어는 '독립운동가 피규어'다. 눈길 닿는 곳곳에 독립운동가 피규어를 배치해 두었는데, 일상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나만의 방법이다.

▲독립기념관 '카페 청산리'에서 판매하고 있는 독립운동가 피규어(왼쪽부터 윤봉길, 안중근, 김좌진). 관내에 조성된 독립운동가 동상들을 축소 재현한 것이다. ⓒ 김경준
나의 독립운동가 피규어 수집은 2017년 천안 독립기념관에 갔을 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당시 기념품점에서 구매한 '김좌진 장군 피규어'가 인생 첫 피규어였다.
이후 2019년 3.1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 관련 상품들이 대거 출시되면서, 독립운동가 피규어를 제작하는 크라우드펀딩도 꾸준히 등장했다. 당시 나는 펀딩 오픈 소식만 기다리며 살았고, 그렇게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 피규어를 펀딩으로 구입했다. 텀블벅이나 와디즈 같은 펀딩 플랫폼도 독립운동가 피규어를 구입하기 위해 처음 가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2019년 12월 27일 홍대의 한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 '그날을 잇다'에 소개된 독립운동가 피규어들 ⓒ 김경준
저항의 상징이 된 '홍범도 피규어'
2024년 한 피규어 전문 제작업체가 크라우드펀딩으로 선보인 '홍범도 장군 피규어'는 후원자만 367명, 달성률이 360%에 달할 정도로 크게 성공했다. 홍범도 피규어에 쏟아진 관심은 당시 한창 논란이 되던 윤석열 정부의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시도'와 무관하지 않았다고 본다.
홍범도 흉상 철거 반대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던 나 역시 펀딩에 동참했고, SNS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참여를 독려했다. 윤석열 정부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시도에 맞서 국민들이 각자의 집, 사무실, 연구실에 홍범도 장군 피규어를 두도록 함으로써 국민적 저항을 이어가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홍범도 장군 피규어는 지금도 내 사무실 서가에 고이 모셔져 있다. 지칠 때마다 장군의 피규어를 보면서 자세를 고치고 마음을 가다듬곤 한다.
언젠가 홍범도 장군의 피규어로 의미 있는 사진을 연출해보기도 했다. 독립기념관에는 조선총독부를 철거한 뒤 그 잔해를 전시한 '조선총독부 철거부재전시공원'이 조성돼 있다. 그곳에서 총독부 잔해물을 배경으로 홍범도 장군 피규어를 놓고 사진을 촬영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파괴하고 싶어했던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이자 우리 민족을 억압·수탈한 최고기관이었다. 비록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못했으나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가 독립전쟁에서 승리해 총독부를 점령하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고 싶었다.
미완의 과제인 '친일 청산' 완수를 기원하는 의미도 있었다. 해당 사진을 SNS에 올리자 "의미 있는 일을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한 시민의 응원메시지를 받기도 했다.

▲독립기념관 내 조선총독부 철거부재전시공원을 배경으로 촬영한 홍범도 장군 피규어 사진 ⓒ 김경준
역사를 기억하는 또 하나의 방법
한국의 길고 긴 역사에서 존경할 만한 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일상에서 늘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들의 숫자는 또 몇이던가. 역사적 위인을 소재로 한 피규어는 단순한 장난감이 아닌 내가 존경하는 인물의 삶과 정신을 닮고 싶어하는 마음과 의지가 담긴 상징물이다. 그러므로 위인 피규어들을 곁에 두는 것은 역사를 기억하는 또 다른 방법일 수 있다.
그래서 한국사의 위인을 소재로 한 피규어 작품들이 꾸준히 출시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쉽게도 국내 피규어 시장에서는 위인 피규어를 찾아보기 드물다. 크라우드펀딩으로 내놓는 피규어들도 한정 수량 판매 후 단종되기 일쑤다.
2021년 국내의 한 피규어 유통 제작사에서 중국의 피규어 제작사인 공령각과 공동으로 '충무공 이순신 피규어'를 출시한 적도 있으나, 한정판이었기에 지금은 단종되어 구하기 어렵다. 독립운동가 피규어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간간이 소식이 들려오던 크라우드펀딩 소식도 요즘은 뜸하다.
이른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열풍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의 뮷즈(뮤지엄+굿즈)들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한다. 외국인들도 줄 서서 사갈 정도라고 하는데, 그러한 뮷즈들이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전통과 역사를 알리는 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래서 제안해본다. 국내 박물관들이 한국의 위인 시리즈로 피규어를 기획해보는 건 어떨까. 해외에 한국의 역사를 알리는 좋은 아이디어가 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