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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관광 체험으로 귤을 따본 적은 여러 번 있었다. 귤밭에 들어가 사진을 찍고, 나눠 주는 비닐봉지에 귤 몇 알을 꽉 눌러 담던 정도였다. 하지만 올해 가을, 처음으로 누군가의 식탁에 올라갈 '상품용 감귤'을 직접 따는 일을 하게 됐다.

제주살이 5년 만에 마주한 낯설고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더 특별했던 건, 그 밭이 우연히 정해진 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인 언니가 먹여준 세 종류의 감귤 중, 내가 가장 맛있다고 말했던 바로 그 귤이 자라는 밭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내 손으로 직접 수확하는 일이 이렇게 설렐 줄은 몰랐다.

처음으로 '일'로 딴 감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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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밭에 도착하자 아침 햇살이 나무 사이로 조용히 들어오고,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며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오늘 따는 건 네가 맛있다고 했던 그 귤이야."

감귤을 수확하기 위해 가지를 자르는 과정. 처음으로 '일'로서 감귤 따기에 참여했다. 직접 수확에 참여한 밭의 모습.
감귤을 수확하기 위해 가지를 자르는 과정.처음으로 '일'로서 감귤 따기에 참여했다. 직접 수확에 참여한 밭의 모습. ⓒ 이현숙

언니의 이 한 마디에 괜히 마음이 더 단단해졌다. 가위를 손에 쥐고 첫 귤을 따는 순간 가지가 '톡' 하고 끊어졌고, 귤 하나가 손바닥에 얹히자 묵직한 감촉이 전해졌다. 관광 체험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무게였다. 햇빛과 바람과 시간이 한 알에 들어 있다는 걸 손끝으로 처음 느꼈다.

노란 귤을 하나 씩 빨간 귤 바구니에 담는 동안 묘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도시에서 일할 때는 늘 결과와 속도가 중요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과정이 전부인 듯했다. 일정한 리듬으로 귤을 따고, 옮기고, 또 따다 보면 잡념이 멀어졌다. 반복이 단순해서가 아니라, 반복 속에서 내가 잠시 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에 몰입하면서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처음 겪는 종류의 고요였다.

"빨리 따는 게 중요하지 않아. 열매에 상처가 나지 않게 조심히, 한 알 한 알 정성을 들여줘."

귤 따기 체험을 갓 졸업한 초보 일꾼에게, 언니는 막중한 책임감을 부여했다. 귤나무 사이에서 그 말을 들으며 '내가 맛있다고 했던 그 귤'이 정성의 손길을 거쳐 자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밭 전체가 하나의 큰 호흡처럼 느껴졌다. 내가 지금 하는 일도 그 호흡에 잠시 합류한 것 같았다. 좋아한다고 말했던 귤을 직접 따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큰 의미가 있었다.

귤밭에서 먹은 두루치기 한 끼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언니가 오늘 점심은 두루치기를 먹자고 했다. 나는 허리를 펴며 음식점으로 갈 채비를 했지만, 언니는 이미 전화를 걸고 있었다.

"○○네 밭이요. 두루치기 8인분 부탁해요!"

잠시 후 오토바이 한 대가 귤밭 입구에 도착했다. 휴대용 가스레인지와 프라이팬, 손질된 고기와 채소까지 모두 실려 있었다. 도시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귤나무 사이 작은 공터에서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리자 양념 냄새가 달큰한 귤 향과 섞여 밭 전체에 퍼졌다.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자연스러웠다. 밭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이 아니라, '밭과 함께' 밥을 먹는 기분이었다.

귤을 담는 상자 '콘테나'를 의자 삼아 둘러앉아 두루치기를 먹는 동안 언니와 일꾼들은 농사 이야기를 이어갔다.

"올해는 이 밭의 나무들이 풍년이고, 내년엔 해걸이야."
"가을에 열매가 익는데, 가을이 자꾸 짧아져서 큰일이지."

도시에서는 숫자와 일정으로만 판단되던 일들이 이곳에서는 흙과 냄새와 바람으로 설명됐다. 그 차이가 신선했다. 밥 한 숟가락에 햇살이 섞여 있던 느낌. 점심을 먹으며 내가 제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선명하게 다가왔다.

밥을 먹고 일을 다시 시작하려는데, 귤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어와 귤 하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도시에서의 일은 나를 계속 앞으로 밀어 붙었지만, 이곳에서의 일은 나를 잠시 멈추게 한다는 사실을. 아무 말도 필요 없고, 어떠한 성과도 필요 없는 시간. 그저 귤 한 알을 손에 올리는 경험만으로도 마음이 채워지는 시간이었다.

수확기를 맞은 제주 감귤밭. 귤밭 곳곳에서 일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제주 가을 햇살 아래 진행된 감귤 수확 작업.
수확기를 맞은 제주 감귤밭.귤밭 곳곳에서 일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제주 가을 햇살 아래 진행된 감귤 수확 작업. ⓒ 이현숙

좋아하는 것과 일이 만나는 순간

점심 이후 다시 가위를 들고 일을 이어갔다. 오전보다 손은 느려졌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단단했다. 귤나무 사이를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가을 빛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한 그 귤을 오늘 내 손으로 직접 따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크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이 귤을 받아 '맛있다'고 말해주면, 그 말이 내게도 돌아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농부들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좋아하는 것을 손으로 만지고, 키우고, 보내는 일. 그 과정에 담긴 감정은 단순한 생산의 기쁨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작은 행복을 전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아이를 키우는 일과도 묘하게 닮아 있었다.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달콤하게 해주는 일, 힘들어도 결국 계속하게 되는 일 말이다.

해가 기울며 귤 바구니가 여러 개의 콘테나를 채워갈 때 즈음, 몸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가벼웠다. 일을 많이 했다는 뿌듯함이 아니라, 무언가를 배우고 돌아가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오늘 내가 딴 귤이 어디로 가서 어떤 하루를 만들지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는 귤 향이 가득했다. 언니가 챙겨준 귤과 오늘의 감정이 함께 담겨 있었다.

#제주감귤#귤따기#제주살이#농부의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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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로 이주해 두 아이를 키우며 삶을 기록하는 엄마입니다. 도시 부모들의 로망과 현실, 육아와 배움의 이야기를 글로 전합니다. 생활 속에서 찾은 진짜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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