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국인의 식탁에서 장은 단순한 양념이 아니다. 한 집안의 품격이었고, 공동체의 유산이었으며, 세월과 철학을 함께 담아낸 삶의 기록이었다. 빠르게 변하는 현대에서 이 오래된 맛을 꿋꿋하게 지켜내는 이들이 있다.

전남 담양과 경북 구미, 서로 다른 땅, 다른 역사 속에서 '장'을 지키는 두 여성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한국 음식의 뿌리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다시금 일깨운다. 기자는 투어 프로그램을 통해 지난 11월 14일 구미의 백야농원을, 24일엔 담양의 기순도 명인의 장독대를 각각 찾아 두 여성의 삶, 손, 그리고 시간 속에 깃든 전통을 들여다봤다.

 담양 기순도 명인의 1200여개의 전통 장독대
담양 기순도 명인의 1200여개의 전통 장독대 ⓒ 김주영

[담양] 죽염, 대숲, 그리고 담양의 바람이 만드는 장맛

AD
담양 창평면 유천리 작은 시골 마을의 푸른 언덕을 오르면, 숨을 멈추게 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1200여 개의 옹기가 길게 늘어선 장독대 사이 사이에는 수백 년의 시간이, 여전히 진행 중인 발효의 고요한 숨결이 들어 있다.

이곳의 주인은 대한민국 전통식품명인 제35호(진장 부문) 기순도(75) 명인으로 장흥 고씨 양진재 종가 10대 종부다. 그녀는 370년 동안 이어온 종갓집 씨간장을 지켜온 인물이자 지난해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때 정부 관계자들과 함께 직접 370년 된 씨간장을 들고 세계 앞에서 전통장을 알린 한국 전통문화 전도사이기도 하다.

 메주를 선보이는 기순도 명인과 따님
메주를 선보이는 기순도 명인과 따님 ⓒ 김주영

"장은 모든 한국 음식의 근원입니다."

죽녹원으로 대표되는 담양은 대한민국 대나무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기 명인의 전통장은 대숲을 타고 흐르는 바람으로 숙성된다. 대나무 통에 간수를 뺀 천일염을 넣고 소나무 장작불에서 굽는 죽염은 이 지역만의 미네랄 향을 품고 장맛의 핵심이 된다. 기순도 명인이 지키는 장은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다.

기 명인은 메주를 만들 때면 목욕을 하고 기도한다. 온전히 '정결'한 마음에서 맛이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콩을 삶고, 찧고, 메주를 만들고, 볏짚에 묶어 실내에 걸어 50일간 발효시킨 후 담양 대숲에서 만든 '죽염' 소금물에 메주를 담그는 과정 등을 거쳐 전통 간장과 된장이 태어난다.

기순도 명인의 장맛을 세계가 알아본 순간은 2017년이었다. 그가 담근 360년 된 간장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국빈 만찬 요리에 쓰이면서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대를 이어 전통장을 만들고 있는 고려전통식품 고훈국 대표가 이를 "미국 역사보다 오래된 간장"이라며 소개한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이건 일이 아니라 제 운명입니다."

기순도 명인의 말이다. 명인을 중심으로 가족 3대가 전통 장 연구에 매달리고, 발효학교를 세워 젊은 세대에게 장 문화를 전하며 사업을 이어가는 이유도 결국 그가 말한 '운명'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된다.

 장독대에서 발효되는 전통 장
장독대에서 발효되는 전통 장 ⓒ 김주영

그러나 담양의 장독대에도 위기는 찾아왔다. 겨울이 짧아지고 여름이 길어지는 기후 변화로 전통 발효 환경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더운 지역에서나 나타나던 붉은 곰팡이가 장독 위로 올라오면서 발효 조건이 달라지고 있다고 한다.

이를 막기 위해 이곳에서는 기존 메주 크기를 절반으로 줄여 전체 발효 기간을 조정하고, 장독 주변에 봉선화를 심어 자연스러운 그늘을 만드는 등 기후 위기 시대에 전통 장의 명맥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기순도 명인은 이렇게 말했다.

"장은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에요. 우리는 뿌리를 내렸을 뿐이고, 여기 찾아오신 분들이 함께 꽃을 피우는 것이죠. 이 전통이 끊기지 않도록 끝까지 잘 지켜가겠습니다."

[구미] 콩, 소금, 장독... 함께 만들어가는 장

 경북 구미 백야농원 이갑자 대표
경북 구미 백야농원 이갑자 대표 ⓒ 김주영

넓은 들판과 낙동강 물길이 어우러진 경북 구미 고아읍의 작은 마을 한편,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자리에는 백야농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담양처럼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것은 아니지만, 3대째 이어온 '생활의 장'과 소박하면서도 강직한 경상도 특유의 손맛이 살아 있는 곳이다.

"우리 장은 짜지 않아요. 몸에 좋은 장이에요."

백야농원 대표 이갑자(61) 씨는 35년간 장을 만들어왔다. 이 집안의 장맛을 지켜온 데는 시어머니의 세심한 손길이 큰 역할을 했다. 콩을 8시간 푹 삶아 메주를 만들고, 황토방에서 한 달 동안 발효시키고, 정월 대보름 전후 말날에 장을 담가 2년 이상 숙성하는 전통 방식.

그녀는 이 모든 과정을 시어머니에게서 그대로 배웠다. 그렇게 수십 년을 장독대와 함께 보낸 끝에, 백야농원은 2021년 대한민국 장류 발효대전에서 '된장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전국적으로 장맛을 인정받는 농원으로 자리매김했다.

기자가 주목한 백야농원의 장맛은 '직접 농사'와 담장 너머 이웃과의 교류에서 시작된다는 점이었다. 5000평의 콩밭에서 직접 재배한 콩, 이웃 농가와의 계약 재배, 신안 증도 염전에서 들여온 천일염을 3년 더 간수를 빼 사용한 소금, 황토방에서의 메주 발효와 장작불로 띄운 청국장, 그리고 마을 어르신들이 하나둘 건네준 '사연 있는' 항아리들. 모든 요소가 지금의 백야농원을 만들어냈다.

 100여년 된 백야농원의 씨간장
100여년 된 백야농원의 씨간장 ⓒ 김주영

좋은 장은 장독대 항아리에서 시작된다고들 말한다. 한 시절 아이들을 된장국으로 키웠던 기억, 시댁 첫해 항아리를 깨뜨렸던 추억, 개구쟁이 아들이 개구리를 넣어두어 놀랐던 일까지. 이갑자 대표와 동고동락한 장독대는 '구미 농촌 삶의 증인' 그 자체였다. 그렇게 보물처럼 지켜온 항아리 속 장을 맛보니 짜지 않으면서도 깊고 구수한 풍미가 혀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서로 다른 지역, 같은 철학... 한국의 장이 품고 있는 것들

전남 담양과 경북 구미는 말투 만큼이나 기후와 토양을 비롯한 환경 조건이 서로 다르다. 370년 전통이 내려오는 종가의 장맛을 간직한 담양과, 일상의 삶 속에서 대대로 길러진 서민적 장맛을 지닌 구미는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 두 지역의 장맛이 공존하기에, 우리의 식탁은 보다 다채로운 풍미와 식문화의 다양성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두 곳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콩, 소금, 물, 바람 등 오직 자연만으로 장을 만든다는 원칙, 시간을 믿는 발효의 철학, 후대에 전통을 반드시 잇겠다는 소명감, 장이 곧 삶이고 정체성이며 문화라는 깊은 깨달음. 무엇보다 의미 깊은 점은 이 모든 전통을 '여성의 손'이 지켜왔다는 사실이다. 수백 년간 장독대를 보살핀 것도 어머니들이었고, 지금 한국의 장문화를 세계로 알리고 있는 주역 역시 바로 그 여성들이다.

 전통장을 사용해 맛볼 수 있는 한식 다이닝
전통장을 사용해 맛볼 수 있는 한식 다이닝 ⓒ 김주영

지난해 12월,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된 것은 단순히 과거를 기념하기 위한 일이 아니다. 기술과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에도 느림, 자연, 그리고 철학을 품은 발효 문화가 여전히 세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담양의 메주 향을 맡고, 구미의 장독대 앞을 서성이며 기자는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장은 재료만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사람으로 만들어진다는 것. 정성, 인내, 자연에 대한 예의, 삶을 대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이 장독 속에서 서서히 발효되고, 다시 식탁 위에서 되살아나기에 세계가 매료되는 것은 아닐까.

기순도 명인의 담양 거처는 이미 미슐랭 스타 셰프를 비롯해 국내외 수많은 이들이 찾아와 맛보고 배우는 발효학교로 자리 잡았다. 구미 백야농원 역시 체험 관광객을 받아들이며 농업 6차 산업 모델을 실천하는 한편, 앞으로 전수관 설립이라는 꿈을 품고 있다. 한국의 장은 이렇게 지금도 조용히 숨 쉬며, 미래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은평시민신문/네이버블로그(지구별시골쥐)에도 실립니다.


#전통장#발효식품#기순도#백야농원#미슐랭셰프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김주영 (jootime) 내방

現) 프리랜서 기자/에세이스트 前) 농식품부 2030자문단 / 유엔 FAO 조지아사무소 / 농촌진흥청 KOPIA 볼리비아 / 환경재단 /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 유엔 사막화방지협약 태국 / (졸)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 (졸)경상국립대학교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