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장님,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시 그 피자 가게를 다시 하시겠어요?"

지난 11월 28일,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던진 질문에 조현천 사장(46)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2010년 부사관을 전역하고 주변의 권유로 시작한 피자 프랜차이즈. 그에게 그 시간은 '꿈을 향한 도전'이 아닌 '고통스러운 좌절'이었다.

프랜차이즈 라는 '덫'

AD
2010년 2월, 조현천씨는 지방에서 모 피자 브랜드 가맹점을 열었다. 처음 1년간은 수입이 좋았다. 매일 아침 8시부터 밤 12시까지 빵 반죽부터 배달까지 하는 상당한 노동 강도였지만 수익이 좋으니 그다지 고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결혼도 하고 가게는 안정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런저런 사정으로 2012년 인천으로 이전한 이후부터 수익은 급격히 악화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브랜드 인지도 하락으로 수도권에서는 다른 피자 브랜드에 밀리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끝물(브랜드 인지도)에 들어간 것이었어요."

브랜드 가치 하락으로 가맹점 대부분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도 본사는 가맹점 지원 대신 자사 수익 지키기에만 집중했다. 불필요한 전단지를 본사에 주문하도록 강요하고, 판촉 행사 참여를 압박했으며, 납품 재료값은 올리면서 판매가는 동결했다.

"내 가게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어요. 프랜차이즈니까 간섭은 있을 수 있지만, 수익이 나야 상쇄가 되는 거잖아요. 고생스러워도 월 500, 700 벌면 본사가 갑질해도 참죠. 근데 그게 아니었죠."

결국 수익성 악화로 아내까지 주방에 매달렸다. 이 때문에 어린 두 딸을 유모차에 태워 가게에서 돌봐야 했고 이는 아내와의 다툼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인건비라도 아끼려 가족이 매달렸지만 그 돈마저 남지 않았다. 결국 2016년, 1억 3천만 원에 창업한 가게를 3천만 원에 넘겼다. 1억 원을 까먹은 셈이었다.

"극단적 생각까지 들었죠. 진짜로 우울증 걸렸어요."

지옥에서 탈출해 다시 지옥으로

도망치듯 그 피자 브랜드를 떠나 이번에는 치킨 프랜차이즈로 전환했다. 하지만 그 앞에는 또 다른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2만 원에 두마리를 주는 1+1 치킨의 마진은 고작 3천 원이었다. 튀김기가 내뿜는 유증기 속에서 8개월을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아내가 파절기에 손가락을 다치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인생 사모작의 기로에서 이번에는 개인 피자 가게를 열었다. 프랜차이즈 때 보다 수익성은 조금 나았지만 브랜드 인지도가 전혀 없어 좋은 재료를 써도 입소문은 더디기만 했다. 전단지를 배포하고 박스 디자인을 바꾸는 등, 나름의 노력을 들였지만, 비용만 쌓여갔고 결국 1년 6개월 만에 또 문을 닫아야 했다.

그 사이 셋째 아이가 미숙아로 태어나면서 조 사장에겐 고민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배달 대행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시시때때로 닥치는 도로 위의 위험과 계절이 선사하는 악천후와 싸우면서 오토바이를 몰아 돈을 벌었다. 하지만 단순노동 외벌이로는 생활이 빠듯했다.

사장에서 최저급여 직원으로 그리고 다시 사장으로

오토바이 수리 오토바이를 수리하는 조현천씨
오토바이 수리오토바이를 수리하는 조현천씨 ⓒ 권성훈

2019년, 이 상황에서는 가족의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는 판단에 청년 시절 배운 자동차 정비 기술을 살려 오토바이 수리점 취업에 도전했다. 마흔한 살의 나이에 부천 일대 십여 곳의 수리점을 두들겼지만 모두 "나이가 많다"라며 거절했다. 우여곡절 끝에 허락된 곳의 월급은 기술 전수라는 이유로 최저 시급에 못미치는 180만 원. 주 6일 하루 십수 시간 근무로 피로했지만, 퇴근 후에는 배달대행을 부업으로 자정까지 일했다.

"2년 반을 그렇게 살았어요. 생활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었죠."

하지만 성실함을 인정받아 3개월마다 30만 원씩 월급이 올라 2년 반 만에 330만 원까지 받았다. 청년들의 기피 직종에서 묵묵히 기술을 익힌 덕분이었다. 그렇게 2024년 9월, 마침내 자신의 가게를 열었다. 10평짜리 수리점에서 시작해 1년 3개월이 지난 지금, 지점까지 오픈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오토바이 수리점도 경쟁이 치열해 시장 개척이 쉽지 않지만, 조 사장은 자신 있다고 한다.

"전문성과 노력, 그리고 친절함이 있으면 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힘들지 않아요."

모든 것을 잃을 뻔했던 그때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폐업하기 직전, 조 사장은 사구체신염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과도한 노동과 스트레스의 연관성을 언급했다. 당시 그는 스테로이드 100대 분량을 수십 번 맞으며 버텼다고 한다. 12년간 사장 생활을 하다가 월급 180만 원의 오토바이 수리점 막내 직원이 됐을 때는 자존감도 바닥을 쳤다.

"사람 만나는 게 싫었어요. 전화 와서 근황 물어보면 그냥 '그럭저럭 지낸다'라고만 했죠. 많이 위축됐었죠."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수변공원을 산책하고, 주말엔 가족과 외식을 즐긴다. 직원들에게 가게를 맡기고 평일에도 시간을 낼 수 있다. 건강도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워졌다고 한다.

"그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삶이에요. 항상 피곤하고 쫓기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여유가 있어요."

다시 꿈을 꾸다

오토바이 수리점 사장이 되다. 신규 개점한 오토바이 수리점에 서 있는 조현천 사장
오토바이 수리점 사장이 되다.신규 개점한 오토바이 수리점에 서 있는 조현천 사장 ⓒ 권성훈

조 사장의 5년 후 목표는 명확하다. 지점을 더 열고, 작은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사는 것. 프랜차이즈 가맹점주 시절에는 꿈꿀 수 없었던 미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잘 되고 있으니까,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거죠."

그의 나이 46세, 15년간 세 번의 지옥을 건너며 배운 것은 '자기 일'의 가치였다. 프랜차이즈의 화려한 간판 뒤에 숨겨진 착취 구조, 사장도 노동자도 아닌 의무만 있고 권리는 배제하는 시스템. 조현천 사장은 그 모든 것을 온몸으로 겪었고 마침내 빠져나왔다.

조 사장은 프랜차이즈 시절을 회상하며 가장 아쉬운 점으로 국가의 "방치"를 꼽았다.

"거의 노동자처럼 본사의 감시와 감독을 받으면서 일했는데, 국가는 '너희는 개인 사업자'라며 보호해 주지 않았어요. 어디 기댈 곳이 없었죠. 지금 프랜차이즈를 하고 계신 분들, 본사를 믿지 마세요."

어쩌면 그는 꽤 긴 시간을 잘못된 길로 돌아왔는지 모른다. 그러함에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으면 결국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오늘 조 사장은 자신의 새로운 매장 앞에서 손님을 기다린다. 이번에는 누구의 간섭도, 착취도 없이.

#프랜차이즈#가맹사업#가맹점#폐업#최저임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연재

왜 우리는 여전히 이래도 되는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세상 이야기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