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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3 15:20최종 업데이트 25.12.04 09:08

한 사람의 목소리가 전하는 묵직한 기록

[서평] 오은정 <이상한 나라에서 왔습니다>를 읽고

햇빛과 선선한 바람이 적당히 불던 초가을, 시청을 지나가다 우연히 북한 관련 행사를 마주했다. 광장에는 따스한 날씨와는 상반된 잔혹한 장면들의 사진과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러다 한편에서 조용히 놓여 있는 얇은 책 한 권이 시선을 붙잡았다. 표지를 들춰보니 탈북민이 직접 쓴 에세이였다. 오은정 작가의 <이상한 나라에서 왔습니다>였다.

책을 파는 이는 스무 살 언저리로 보이는 청년이었고, 혹시나 싶어 묻자 담담히 "제가 쓴 책이 맞아요"라고 답했다. 자신은 1992년생이고, 17살에 한국에 왔다며 북한에 대한 자극적인 이미지와 상업적 서사에 기대지 않고 "제 세대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온도가 좋아 책을 샀다. 집에 돌아와 몇 장 넘기자마자, 나는 책을 산 이유가 친절함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야기는 담담했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묵직했다. 오랜 결핍과 상처를 지나온 사람이기에 가능한 정직한 문체였다. 나는 금세 이 책을 '잘 산 책'이라 부르게 됐다.

밥상엔 김이 몰몰 오르는 흰 쌀밥과 텃밭 채소, 살 오른 멸치국이 전부였다.

오은정 작가의 어린 시절은 1990년대 후반 북한의 미공급 시기(1995년부터 2000년까지 북한 역사상 최악의 대규모 기근인 '고난의 행군'이 시작)를 통과한다. 굶주림이 일상이 되고, 거리에는 떠도는 '꽃제비'들이 흔하던 시절이었다. "먹을 게 없다"는 어머니의 말을 들은 군인 삼촌이 어느 날 조촐한 저녁에 초대했다.

담담하게 비추는 현실

 책표지
책표지 ⓒ 미구출판사

쌀밥, 텃밭의 채소, 살 찐 멸치가 들어간 국. 그것 뿐이었지만, 작가는 지금도 그 장면을 따뜻하게 기억한다고 말한다. 북한의 이야기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싶었다. 내가 아는 북한에 대한 정보는 너무 적고, 남한의 근현대사조차 아직 온전히 알지 못하면서 '반쪽의 반쪽'만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나, 왜 그들은 굶주려야 했으며, 그 힘든 시기에도 서로 도우려는 정이 있고, 우리처럼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책은 그렇게 나의 무지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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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과 나는 어찌 보면 같지만, 물속에 뜬 기름처럼 다르다는 인식이 새삼 떠올랐다.

작가는 영화 <공조2>를 보며, 관객들 사이에서 혼자 웃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영영 물에 섞이지 못하는 기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대목을 읽으며 나 또한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느꼈던 그 미묘한 이질감이 다시 떠올랐다. 외모는 비슷하지만 언어, 분위기, 일상의 질감이 전혀 달라서 생겨나는 낯섦.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탈북민이 겪는 감정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깊을 것이다. 같은 언어, 같은 얼굴, 같은 문화를 지녔음에도 물과 기름처럼 스며들지 못하는 순간들. 작가의 문장은 이 조용한 현실을 정확하고 담담하게 비춘다.

큰엄마의 미소는 블라우스보다 더 값비쌌다.

작가는 북에서 큰엄마와 함께 시장을 수십 번 돌며 흰 블라우스를 고르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북한 시장에선 흔하던 흰 블라우스였지만, 작가가 마음에 두었던 건 유독 비싼 옷이었다. 큰엄마는 "딱 맞네" 하며 오히려 웃었다. 그 한 벌의 옷은 사춘기 소녀에게 어머니의 빈자리를 잠시 메워주고, 그리움을 덮어주는 날개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성인이 된 지금, 작가는 벅찬 살림 속에서도 북에 있는 친척들을 걱정한다. 그 마음의 뿌리는, 어쩌면 그날 큰엄마가 지었던 미소일 것이다.

그 희망은 훔친 쌀에서 시작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새삼 깨달았다. 남북의 문제는 그저 이념의 충돌만이 아니다. 정치도 아니고, 거대한 담론도 아니다. 아주 작은 한 줌의 생존, 내일 굶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최소한의 확신이 사람을 살게 만들었다. 그 희망이, 바로 '훔친 쌀'이었다. 두려움과 죄책감이 뒤섞인 그 쌀이 작가에게 내일을 버티게 한 작은 빛이었다. 희망은 그렇게 시작된다. 거창함이 아니라, 생존의 가장자리에서. 책의 마지막 근처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바라보게 하는 책

오은정 작가 10월 23일 시청 광장에서 처음 마주한 오은정 작가의 미소. 책을 읽고 나서야 그 미소가 얼마나 깊은 시간을 지나 피어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역경 속에서 핀 연꽃 같은 미소였다.
오은정 작가10월 23일 시청 광장에서 처음 마주한 오은정 작가의 미소. 책을 읽고 나서야 그 미소가 얼마나 깊은 시간을 지나 피어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역경 속에서 핀 연꽃 같은 미소였다. ⓒ 이향림

저는 대단한 역사의 한 자리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기록하고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낍니다.

샛노란 낙엽이 절정이던 날, 우연히 펼친 이 책을 읽다 울컥했고, 읽다 웃었고, 읽다 멈춰 섰다. 그녀의 삶은 정치가 아니었지만 정치였고, 역사가 아니었지만 역사였다. 이야기는 그렇게 사람을 움직인다. 구호의 소음이 아닌, 한 개인의 목소리가 가진 힘으로. 책을 덮으며 문득 생각했다. 북한에서의 삶을 들려준 그녀가 이제 한국에서 어떤 이야기를 이어갈지 더욱 궁금해진다고. 그리고 언젠가 그 이야기를 다시 마주하고 싶다고.

하루만이라도 돌아가, 그 시절 나를 살게 해준 사람들과 밥 한 끼 나누고 싶다.

책을 덮고 난 뒤, 나는 오랫동안 한 문장 앞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자동차로 몇 시간 달리면 닿을 거리지만,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멀어진 걸까. 동독과 서독도 통일 전 서로 오가던 시절이 있었는데, 불과 75년 전 한 나라였던 우리는 밥 한 끼 함께하는 일조차 기적이 되어버렸다. 몇 년 전 만났던 통일운동가에게 "통일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물었던 적이 있다.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라셨다. 그때 나는 식사 전에 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의무처럼 읊조리기만 했던 것 같다.

책 <이상한 나라에서 왔습니다>는 거대한 정치보다 한 사람의 삶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책이다.
동정도 선동도 아닌, 조용하지만 정확한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게 한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그 기도를 다시 마음으로 시작했다. 오은정 작가처럼 북에 가족을 두고 그리움 속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움이 늙어버리기 전에 다시 만나기를 바라며.

이상한 나라에서 왔습니다

오은정 (지은이), 미구출판사(2024)


#오은정#이상한나라에서왔습니다#탈북작가#감동에세이#북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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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세계사가 나의 삶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임을 깨닫고 몸으로 시대를 느끼고, 기억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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