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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SK FC와 울산이 경기를 끝마친 지난 11월 30일 오후, 우리 집 거실엔 왠지 모를 온기가 감돌았다. 경기 결과를 확인하자마자 여섯 살 아이가 소파 위에 올라섰고, 작은 두 팔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엄마! 제주가 이겼어! 우와!"

그 순간 팀의 우승이 마치 자기 일인 양 들뜬 아이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한글을 그림처럼 보던 올해 초, 제주 축구 경기 만큼은 하나도 빠짐없이 챙겨보며 한글을 익혀 갔다. 요즘은 '승점', '순위표', '플레이오프' 같은 단어가 '동화책', '자전거', '놀이터'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어가 되었다.

한 동안 하루의 시작은 그날 K리그 순위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밤 사이에 내가 모르던 승점이 하나라도 생겼을까, 혹시나 등수가 떨어지지는 않았을까. 모든 관심이 제주 축구팀에게로 향했다. 우리 집 여섯 살 아이에게 제주의 오늘은 심부름이나 식사, 잠자는 시간을 제쳐두고 걱정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 되어 있었다.

우리 집의 공기가 달라진 밤

 축구를 통해 배운 것.
축구를 통해 배운 것. ⓒ ksoni11 on Unsplash

울산 전에서 제주 SK FC는 1대0으로 승리했다. 화면 속 선수들이 서로 부둥켜 안고 기뻐하던 그 순간, 우리 집에서도 조용히 작은 환호가 터졌다. 여섯 살 아이는 소파에서 뛰었고, 할아버지는 휴대폰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평소 같으면 "아이고, 또 어렵게 하네"라며 잔소리를 곁들였겠지만, 이날 만큼은 함께 환호성을 지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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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그러면 제주는 지금 순위가 어떻게 돼요? 승점은요?"

아이가 묻자 할아버지는 대답 대신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어쩐지 오래전 내 머리 위에 얹히던 그 손과 닮아 있었다. K리그의 승강 플레이오프는 단순한 경기 일정이 아니다. 다음 시즌 어디에서 뛸지 결정하는, 말 그대로 '끝까지 가봐야 아는 길'이다. 그 설명을 듣자 아이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경기보다 진지한 여섯 살의 표정을 나는 처음 본 것 같았다.

"그래서 제가 더 응원해야 돼요."

이번 시즌 제주는 유난히 바람이 거셌다. 감독이 시즌 중 사임하고, 한 경기에서 네 명의 선수가 퇴장 당하는 보기 드문 사건도 있었다. 어른인 나도 마음이 한 번씩 휘청였는데, 아이는 이 흔들림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아이는 오히려 그 흔들림 속에서 이상하게 더 단단해졌다. 어느 날, TV 중계에서 제주의 실점 장면을 본 아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제주 지금 많이 힘들지? 그러니까 더 힘을 줘야 해."

'힘을 보태야 한다'는 말이 이렇게 가볍지 않게 들릴 수도 있다는 걸, 그날 아이가 처음 알려줬다. 할아버지는 그런 아이 옆에서 조용히 경기 장면을 돌려보았다. 판정 하나에도 천천히 고개를 젓던 그 모습은 마치 경기장을 지키는 또 다른 수비수 같았다. 그 진지함이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일까. 흔들리는 팀 앞에서도 더 단단해지는 아이를 보며 생각했다. 혹시 축구가 가르치는 건 '이기는 법'이 아니라 '버티는 법'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어릴 적 가족들과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을 종종 찾았다. 사실 축구를 보기 위해서라기보다, 경기장에서 먹는 치킨과 콜라가 너무 맛있어서였다. 관중석 아래를 지날 때마다 풍기던 기름 냄새, 응원의 함성과 상대편을 향한 뜨거운 고함이 뒤섞인 관중석, 골이 들어가면 먹다 말고 모두가 한꺼번에 환호하던 그 순간들. 그 모든 풍경이 따뜻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나중에야 알았다. 그건 '가족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 나는 엄마가 되었고, 그때 내 옆에서 치킨을 뜯던 아빠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는 새로운 응원자가 생겼다. 경기 규칙을 다 알지 못해도 아이는 누군가를 응원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흔들린 팀을 향해 "괜찮아, 다시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그 용기.

어쩌면 우리 집에서 축구는 경기보다 '사람'을 먼저 배우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아이가 조용히 할아버지 옆에 앉아 팔짱을 끼고 어른 흉내를 내는 모습을 볼 때면 웃음이 나면서도 가슴이 찡하다. 그렇게 치킨 먹으러 경기장 가던 시절의 설렘이, 조금씩 우리 집에 다시 스며들고 있다.

끝까지 집중하던 그 순간

울산 전에서 제주가 터뜨린 한 골은 많은 말들을 대신했다. K리그에서 한 경기의 의미는 종종 다음 시즌의 명운까지 이어진다. 그만큼 그날 선수들의 표정은 유난히 절박하고 단단했다. 나는 화면 속 그 얼굴들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단순히 스포츠가 아니라 삶의 한 장면 같다.'

집중은 원래 얼굴에서 먼저 드러나는 법이다. 실수할까 봐, 혹은 더 잘하고 싶어서 생기는 미세한 근육의 긴장. 그게 화면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할아버지와 아이는 매 경기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봐라.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니다. 이렇게 끝까지 밀어붙이면 좋은 순간이 온다."
"네. 그럼 제가 더 열심히 응원할게요!"

여섯 살 아이의 목소리에서 어쩐지 커다란 울림이 들렸다. 경기보다 더 따뜻하고, 순위보다 더 단단한 장면이 그날 우리 집 거실에 남았다.

다음 경기가 기다려진다. 물론 K리그1에 남느냐, K리그2로 내려가느냐가 결정될 승강 플레이오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가족이 또 한 번 모여 앉아 응원할 시간이 생길 것이고, 아이의 작은 입에서 또 어떤 새로운 문장이 나올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흔들리던 팀이 다시 중심을 찾아가는 과정은 이상하게도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제주 SK 팀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다. 응원은 승부보다 먼저 마음을 만든다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은 세대를 건너 이어진다는 것. 치킨 먹으러 경기장에 가던 그 아이는 엄마가 되었고, 엄마는 다시 아이를 통해 끝까지 응원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올해 제주의 마지막 경기가 될 오는 7일, 아이와 할아버지는 또 나란히 앉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옆에서 이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렇게 속삭일 것이다.

"제주야, 끝까지 가보자. 우리도 여기서 끝까지 응원하고 있을게."

#제주살이#K리그#제주SKFC#사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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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로 이주해 두 아이를 키우며 삶을 기록하는 엄마입니다. 도시 부모들의 로망과 현실, 육아와 배움의 이야기를 글로 전합니다. 생활 속에서 찾은 진짜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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