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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준비를 위해 동네 마트에 들어섰다. 자동문이 열리며 따뜻한 공기가 훅 몰려온다. 밖은 이미 겨울 문턱인데, 실내는 여전히 인공의 온기로 가득하다. 카트를 밀어 채소 코너로 가니, 투명한 비닐들이 겹겹이 쌓여있다. 보호막인 동시에 감옥같은 그 얇은 막들 앞에서, 나는 미묘한 답답함을 느꼈다. 콩나물 한 봉지, 랩으로 두 번 감싼 바나나. 손끝에 먼저 닿는 것은 채소의 생명력이 아니라, 플라스틱의 매끄러운 차가움이다.
습관처럼 가장 뒤쪽에 있는 '하루라도 더 신선한 것'을 고르려던 순간, 앞줄의 샐러드 한 통이 눈에 걸렸다. 상추 끝은 갈색으로 마르고, 용기 바닥엔 물기가 마지막 숨처럼 맺혔다. 오늘 밤이면 이 용기는 상추보다 훨씬 긴 시간을 남기며 쓰레기통으로 향할 것이다. 가격표를 보는 순간, 손이 멈칫한다. 작년보다 크게 오른 금액. 계산대 직원이 말한다.
"여름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요, 요즘 날씨가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잖아요."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데, 입구 전광판에 오늘의 미세먼지 농도가 떠 있다. '나쁨.' 어제도, 그제도 같은 글자였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 봉투 안에 담긴 것들을 들여다본다. 당근은 비닐에 단단히 감겨 있고, 두부는 낱개 포장에 또 한 번 묶여 있다. 아무 가공도 하지 않은 채소와 반찬거리인데도, 마치 먼 길을 오기라도 한 듯 여러 겹의 보호막을 두르고 있다. 문득 읽고 있던 <찬란한 멸종>이 떠올랐다. 우리 손에서 나온 것들이 결국 우리를 둘러싼다는. 요즘 부쩍 자주 드는 의문과 함께.
'내가 사는 건 음식일까, 포장일까.'
싱크대 옆에 분리수거 봉투를 펼쳐놓고, 하나씩 뜯어낸다. 샐러드 플라스틱 용기, 두부 비닐 팩, 당근을 감싼 비닐. 사과를 감싸고 있던 완충재. 칼로 채소를 자르고, 상추를 씻으며 물을 튼다. 손끝에서 물이 흐르고, 옆 봉투에는 포장지가 계속 쌓인다. 부엌 한쪽은 만들고, 한쪽은 버리는 일로 바쁘다.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또 봉투가 가득 차 있다. 혼자 살고, 매끼를 새롭게 차리는 것도 아닌데도, '내가 만들어 내는 건 음식보다 쓰레기가 더 많은 건 아닐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말이 공중에 닿기도 전에, 이미 봉투는 다음 쓰레기를 기다리는 듯 입을 벌리고 있다.
책을 한 권 주문했을 뿐인데, 어제 도착한 택배는 비닐 두 겹, 완충재 한 뭉치, 종이 박스까지 그득 달고 왔다. 책보다 포장이 더 많다는 사실을, 이젠 놀랍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나 자신에게 순간적으로 섬찟함이 스쳤다.
이 감각은 요양원으로 향하던 날 한층 또렷해졌다. 차창 밖으로 겨울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얼마전까지 피어있던 코스모스는 이미 지고, 앙상한 가지들만 차가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저 푸른 하늘마저 언젠가 미세먼지에 뿌옇게 가려질까봐 괜스레 불안해진다.
창 밖 햇살을 기대하며 요양원 문을 열었지만, 복도는 고요했다. 어르신들은 창을 등지고 앉아 작은 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간호사가 말했다.
"미세먼지가 며칠째 나쁨이에요. 산책을 못 나가시니 어르신들이 답답해하세요. 예전엔 봄철에만 이랬는데, 갈수록 계절에 상관없이..."
창밖을 보니 햇살은 밝고 눈부시다. 몇 달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한 완벽한 날씨다. 그런데 창문은 단단히 닫혀 있다. 휠체어를 탄 어머니를 창가까지 모셨다. 유리창 너머에서 따스한 햇빛이 쏟아지는데, 공기는 오지 않았다. 바람도, 흙냄새도, 바깥의 겨울 햇살도 모두 막혀 있었다.
어머니 눈이 창밖을 오래 붙잡았다. 창가에 앉은 다른 어르신들 또한 유리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양원 어르신들의 얼굴은 마스크 뒤에 반쯤만 드러난다. 입김이 섬유 안쪽에 차갑게 고인다. 뺨에 닿는 천이 까슬하다. 마트에서 비닐 감싼 채소를 집을 때, 손끝에 닿던 그 차가운 매끈함이 떠올랐다.
'마스크 안의 공기, 비닐 안의 공기.'
요양원을 나오며 문득 이런 상상을 했다. 지구 어딘가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인간이 만든 포장지들을 천천히 펼쳐보고 있다면 어떨까. 비닐과 플라스틱, 마스크와 완충재들을 한데 모아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너희가 만든 오늘의 지도다."
추위처럼 스며드는 현실은, 우리가 버리는 것들이 어느새 우리의 계절을 바꾸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뜻했던 날씨가 갑작스레 추워지고, 비정상적인 기온이 반복되는 계절의 혼란 속에서, 가장 변하지 않는 것들은 오히려 우리가 버린 비닐 조각들이다. 그 조각들이 겹겹이 쌓여, 미래 세대에게는 지구의 새로운 단면처럼 남을지도 모른다. 한순간, 내가 매일 뜯어 버리는 비닐 한 장이 지구에 찍히는 작은 흠집처럼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침에 내놓았던 분리수거 봉투가 그대로다. 봉투 안에서는 샐러드 용기와 비닐들, 택배 완충재들, 그리고 요양원에서 봤던 것과 같은 일회용 마스크들이 뒤섞여 있다. 나는 그 봉투를 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겨울 문턱의 찬 공기가 봉투 틈으로 스며들어 얇은 비닐을 조금씩 흔들었다. 집안으로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간다. 냉장고에서 두부를 꺼내 비닐을 뜯는다. 손끝에서 뜯겨나온 얇은 비닐이 형광등 아래에서 반짝이다가 그대로 떨어진다.
손에서 또 비닐이 나온다. 모든 계절보다 오래 남는 것은, 결국 우리가 만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어쩌면 우리는 멸종을 걱정하면서도, 매일 5분짜리 편리함을 택하며 나약하게 쓸려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립니다.역대급 폭우와 가뭄이 번갈아 닥치는 이상기후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산불이 이제 익숙해져 가면서도 우리는 당장의 편리함을 쫒는다. 이제는 멈춰야 한다는 마음을 이글을 읽는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