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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서귀포에 살며 가장 익숙한 산책길이 된 새연교. 올해 여름부터 10월 말까지 이어진 '금토금토 새연쇼' 덕분에 이곳은 우리 가족에게 축제 같은 장소로 남아 있다. 음악 분수와 불꽃놀이가 매주 펼쳐진 그때의 기억은 공연이 끝난 지금도 아이들의 마음 속에서 환하게 켜져 있다. 소아과를 다녀오던 지난 11월 하순 지난 주말, "오늘도 음악 분수 해요?"라고 묻는 아이들의 말에 우리는 오랜만에 다시 새연교를 찾았다. 공연이 멈춘 뒤 고요해진 새연교는 예전보다 더 많은 풍경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조용해진 다리에서 비로소 보인 풍경

서귀포항과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새연교 초입. 행사가 끝난 뒤, 더 넓고 고요하게 느껴지는 새연교의 풍경.
서귀포항과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새연교 초입.행사가 끝난 뒤, 더 넓고 고요하게 느껴지는 새연교의 풍경. ⓒ 이현숙

차에서 내리자마자 6살 첫째 아이는 다리 앞에서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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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오늘은 진짜 빨리 달릴 수 있겠어요!"

이미 음악 분수도 불꽃도 사라진 새연교였지만, 첫째에게는 여전히 달릴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던 모양이다. 다리가 넓게 비어 있는 날이면 아이는 그저 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실제로 아이는 바람을 가르며 다리 위를 쭉 내달렸고,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까지 온몸으로 즐기고 있었다.

반면 세 살 둘째는 발걸음이 전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음악 분수가 올라오던 자리를 맴돌며 "오늘은 물 안 나와요?" 하고 몇 번이고 물었다. 작은 발로 조심스레 음악 분수가 가장 잘 보이던 명당 자리를 돌며, 그 반짝이던 여름 밤을 다시 떠올리는 듯했다. 공연이 끝났다는 건 어른에게만 명확한 사실일 뿐, 꼬마에게 새연교는 아직도 불꽃과 물기둥과 레이저로 섞여 빛나던 환상의 무대였다.

그런 아이들과 달리 남편은 다리를 건너기도 전에 멈춰 선다. 새연교 초입의 해안가, 그동안 우리 가족이 수없이 지나쳤던 자리에 사실 꽤 귀한 풍경이 자리한다. 바로 서귀포층 패류화석 산지, 쉽게 말해 아주 오래전 이곳이 바다였다는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지층이다. 학생 시절 지구과학을 무척 좋아했던 남편은 바닷가 절벽에 층층이 쌓인 줄무늬를 보며 감탄을 멈추지 못한다.

"시간이 이렇게 층층이 쌓일 수도 있구나."

초겨울 저녁, 가족의 발걸음이 머문 조용한 새연교. 새연교로 빠르게 다가가는 가족의 모습(왼쪽), 음악분수를 기다리듯 바라보는 꼬마의 작은 뒷모습(오른쪽)
초겨울 저녁, 가족의 발걸음이 머문 조용한 새연교.새연교로 빠르게 다가가는 가족의 모습(왼쪽), 음악분수를 기다리듯 바라보는 꼬마의 작은 뒷모습(오른쪽) ⓒ 이현숙

지층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마치 케이크를 여러 겹으로 자른 듯한 결이 선명하다. 각 층에는 오래전 바다의 하루하루가 담겨 있다. 모래가 쌓이고, 조개껍데기가 쌓이고, 파도와 바람이 다시 그 위를 뒤덮는 일이 수도 없이 반복되며 만들어진 흔적이다. 어떤 층에는 조개가 거의 원형 그대로 박혀 있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조차 옛날에는 바닷속이었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지층을 바라보던 남편이 조용히 말했다.

"이게 몇 년이 아니라 몇 만 년이 쌓인 거래."

그 말만으로도 오래된 시간의 무게가 확 전해졌다. 아이들은 음악 분수를 떠올리며 이곳을 찾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제주가 품어온 긴 시간을 마주한 셈이었다. 제주의 돌과 흙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된 이야기와, 훨씬 넓은 세계와 맞닿아 있었다. 축제가 끝난 새연교에서 이런 오래된 풍경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는 사실이 묘하게 마음을 울렸다.

바람과 노을이 만든 또 다른 공연

새연교 위로 발을 옮기자 해가 지기 시작했다. 다리 난간은 노을빛을 받아 금빛으로 물들었고, 하늘은 구름 사이로 분홍빛이 번져 나왔다. 여름 밤의 화려한 조명 대신 겨울 초입의 빛은 훨씬 차분했고, 그래서인지 마음이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다리 위를 오르는 아이들의 모습이 노을의 빛깔과 함께하니, 머리카락을 한껏 날리는 바람 소리마저 마치 음악처럼 들렸다. 공연이 없어도 우리는 스스로 음악을 찾아냈고, 조용한 새연교는 우리의 귀에 새로운 배경음을 들려주는 듯했다. 이제 이곳의 음악은 파도와 바람, 그리고 노을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소리였다.

한때는 새연쇼의 화려함에 가려 잘 느끼지 못했던 새연교의 본래 얼굴. 이날처럼 고요한 초저녁의 새연교는 '서귀포 일몰 명소'라는 표현을 스스로 증명해냈다. 바다 위로 드리워진 도시의 불빛, 노을 아래 천천히 움직이는 구름, 다리 난간에 반사되는 부드러운 빛. 이 모든 풍경이 겹쳐 마치 천천히 움직이는 풍경화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서귀포층 패류화석 산지. 오래전 이곳이 바다였다는 조용한 증거. 바닷가 절벽에 남은 지층의 시간.
서귀포층 패류화석 산지.오래전 이곳이 바다였다는 조용한 증거. 바닷가 절벽에 남은 지층의 시간. ⓒ 이현숙

걷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을 찾을 때마다 새로운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화려한 공연 때문이 아니라, 이 다리가 품고 있는 '시간의 결' 때문이 아닐까 하다. 공연은 한 철에 그치지만, 바다는 늘 제자리에 있고, 지층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노을은 그날의 색으로 다리를 덮는다.

그 자연의 공연 속에서 우리는 아주 천천히 걸었다. 첫째는 바람을 따라 달리고, 둘째는 음악 분수가 있던 자리에서 아쉬움을 품고 서성이며, 남편은 오래된 지층을 되새기고, 나는 그 모든 장면을 바라보며 서귀포 바다가 주는 고요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새연교의 아름다움은 다리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리 끝에 서면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시선이 닿는 곳, 바로 새섬이다. 멀리서 바라본 새섬은 울창한 숲과 고요한 능선이 노을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공연 시즌에는 늘 북적여 새섬까지 이어진 길을 여유롭게 바라볼 틈이 없었는데, 이날은 오히려 고요함 덕분에 새섬의 실루엣이 더 선명해 보였다.

이날 우리는 새섬에 들어가진 않았다. 대신 다음에는 저기까지 걸어가보자는 약속을 조용히 나눴다. 도심에서 몇 백 미터 떨어져 있을 뿐인데, 숲으로 한 발만 들어가도 소리가 달라진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새연교의 바람과 노을을 충분히 느끼고 돌아가는 길, 다음 여행의 시작점이 그곳에 있다는 생각이 차분하게 설렜다.

다리 끝에서 기다리는 다음 여행

서귀포 일몰명소 새연교에서 바라본 노을 아래 범섬. 노을빛 아래 물든 서귀포 바다. 겨울 초입의 색이 더욱 선명하다.
서귀포 일몰명소 새연교에서 바라본 노을 아래 범섬.노을빛 아래 물든 서귀포 바다. 겨울 초입의 색이 더욱 선명하다. ⓒ 이현숙

새연교 끝에서 새섬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파도와 바람이 깎아 만든 지층, 금빛으로 물든 다리, 그리고 숲을 머금은 작은 섬. 이 모든 풍경은 빠르게 스쳐가는 여행보다 느리게 걷는 산책이 더 잘 담아낼 수 있다. 다음에는 그 느린 걸음을 새섬에서 이어갈 예정이다.

해가 완전히 지고 새연교에 어둠이 내려앉자 바다는 더 조용해졌고, 다리는 차갑게 식어갔다. 공연도 불꽃도 물줄기도 없었지만, 새연교는 여전히 제주의 시간을 잇는 다리였다. 그날의 노을처럼 조용하고 따뜻한 감정이 오래 마음속에 머물렀다.

우리는 그렇게 새연교를 떠났다. 어쩌면 가장 큰 공연은 여름 밤의 쇼가 아니라, 이런 조용한 저녁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건지도 모른다.

#제주살이#서귀포여행#새연교#서귀포층패류화석산지#서귀포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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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로 이주해 두 아이를 키우며 삶을 기록하는 엄마입니다. 도시 부모들의 로망과 현실, 육아와 배움의 이야기를 글로 전합니다. 생활 속에서 찾은 진짜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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