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파구 석촌동에 위치한 삼전도비 ⓒ 이재환
당대의 글쟁이 조정 대신들이 자신의 필력을 숨기고 졸필을 선보인 때가 있었다. 대한제국 말기 문사들이 일왕에게 일본과 합방해 달라는 청원서를 쓰고,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의열지사 안중근의 사죄문을 썼던 일과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라 할 것이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한 후 청국은 조선 왕조에 견디기 어려운 굴욕을 강요했다. 그중의 하나가 삼전도에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우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자기네가 비문에 새긴 글을 쓰겠다고 했다가 태도를 바꿔 조선이 지어 보내면 검토하겠다고 나왔다. 철저하게 망신주기 수작이었다. 비석에 새길 '대청황제 공덕비문'을 지어 올리라는 조처였다.
조정의 대소 신료와 선비들은 공포와 불만에 떨었다. 조선은 성리학적 명분사회였다. 비록 국왕이 치욕을 당했지만 개인들에게 여전히 대의명분은 소중한 가치였다. 누구라도 후손만대에 치욕으로 남을 비문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인조는 예문관의 수장으로 당대의 문장을 대표하는 이경석과 대북영수 이상해의 아들로 명분장가인 장유, 역시 대문장가로 청국에도 알려진 이경진, 3대가 진사에 장원한 조희일을 지명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이런저런 핑계만 대고 글을 지으려 하지 않았다. 인조는 이들에게 모두 짓도록 하였다.
문장가로서의 명성이 자신의 목을 조여오자 이들은 일단 보신하고자 회피하는 방책을 택한다. 네 사람 모두 사퇴할 뜻을 상소를 통해 내비친 것이다. 그럼에도 인조가 계속 글을 올리라고 독촉하자 결국 피할 수 없게 된다. 이 가운데 이경전은 때마침 병이 도지는 덕에 자연스레 후보군에서 탈락하는 행운을 누렸고, 나머지 셋은 울며 겨자 먹기로 글을 썼다.
여기서 일부러 글을 '개판으로(!)' 쓴 조희일이 우선 탈락하고 나니 최종 후보는 장유와 이경석으로 좁혀졌다. 두 사람이라고 하여 글을 성의 있게 쓴 것은 아닌데, 장유는 비문의 고사를 잘못 인용하는 등 내용상의 결함이 많고, 이경석은 내용이 소략하다는 청 측 검열관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청나라 소속 한인 학자들이 장유의 글을 검토하고는 은연중 황제를 얕잡아보는 대목을 발견해 장유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렇지만 '누가 더 못 썼나'하는 내기에서 장유가 이겨 이경석이 삼전도비의 비문을 쓰는 악역을 떠맡게 된다.(김동욱, <독사의 글이 아니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만주글자, 오른쪽에는 몽골 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씌여 있다. 이경석 등은 훗날 엄청난 설화에 휩싸였다.
대청황제공덕비
기미년에 우리 조선이 강홍례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명을 돕게 하였는데, 장병들이 대패하여 피살된 자도 있고 사로잡힌 자도 있었다. 우리 태조황제께서 화호를 중요하게 여기시어 사로잡힌 장병들을 모두 놓아 주었다. 그런데도 우리 조선이 여전히 명나라를 돕다가 다시 대청에 죄를 얻게 되었다. 이에 정묘년에 황제께서 대군에게 정벌을 명하셨다. 우리나라 군신들이 그 예봉을 당하지 못하고 마침내 강화도에 숨었다가 화친을 청하자, 황제께서 윤허하고 오히려 형제국으로 여겼으며, 빼앗은 토지를 모두 돌려주고 강홍례도 또한 환국하게 했다.
(정묘년 이후) 10년 동안 황제께서는 형제의 예를 다하셨으나, 우리 조선국이 깨닫지 못하고 미혹되어, 여전히 명을 돕고 대청을 형으로 여기지 않더니, 먼저 병화의 단서를 스스로 일으켜 변방의 신하에게 신칙하기를 '충의지사로 하여금 각기 책략을 바치게 하고, 용맹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원하여 종군토록 하라'고 하였다.
대청국의 사신이 이 문서를 얻어 황제에게 보였다. 황제가 우리 조선이 화평을 무너뜨렸음을 밝혀 아시면서도 오히려 호생(好生)의 마음으로 그 죄를 밝히면서 '모년 모월 모일에 정토하리라'고 하시고, 우리에게 정토의 시비를 밝혀 가르쳐 주시기를 하늘이 재이로써 사람에게 보여주듯, 아버지가 자식을 가르치듯, 형이 동생을 가르치듯 하시었다.
만일 진실로 우리나라 사람들을 살해하려는 마음이 있으셨다면 반드시 불시에 군사를 내시어 그 방비 없을 때 공격하셨으리니, 어찌 기꺼이 밝게 우리를 가르치셨겠는가. 그런데도 국왕이 깨닫지 못한 고로 황제가 대군을 친히 이끌고 우리 조선을 정벌하신 것이다.
(조선이) 감히 맞서지 못하여 군신의 처자들은 모두 강화도에 숨고 국왕은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동남도의 병장들이 서로 이어져 무너졌고 서북도에서는 협곡에 둘러싸여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우리 조선국왕은 안으로 군량이 없고 밖으로 원병이 없었으며 형세는 궁하고 힘은 다하였다. 강화도에 있던 우리 군신의 처자들은 모두 황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황제께서 만물을 포용하는 마음가짐으로 우리 군신 처자에 대해 장병들이 침해하지 못하게 하시고, 조선 관원으로 하여금 태감과 더불어 간수하게 하였다. 황제께서 칙서를 내려 죄를 사하여 주시니, 우리 조선의 군신과 백성들이 큰 가뭄에 비를 만난 듯, 물에 빠졌다가 구해진 듯하며, 기뻐하고 두려워하여 황제의 군대 앞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은상이 우리 군신에게 두루 미쳤으며, 붙잡힌 처자들은 모두 도성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시었으니, 이미 끊어진 종사가 다시 이어지고 이미 무너진 조선이 50일 만에 다시 서게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군신과 만민들이 황제의 공덕과 은택을 칭송하여 머리 위에 이고자 하였다. 황제의 공덕은 천지와 더불어 오래가리니, 우리나라가 태평을 누리게 된 것은 모두 황제께서 여기에 와 정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황제께서 머무르신 단장(壇場)에 돌을 깎아 비석을 세워 (그 공덕을) 드러내었다.
덧붙이는 글 | [붓의 향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