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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초입으로 들어선 11월 29일 아침, 서울 상암동 평화공원 평화광장의 공기는 겨울 날씨라는 것을 알리는 듯 무척 매서웠다. 손발이 시렵고, 바람이 굉장히 차가운 영하에 가까운 날씨였지만, 광장 한복판은 묘한 열기로 데워지고 있었다.

새벽 6시, 7시부터 모여든 천여 명의 사람들. 그들은 화려한 러닝 기어를 갖춘 전문 마라토너들이 아니었다. 휠체어를 탄 이들, 유모차를 타거나 부모의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 그리고 가슴에 노란 리본이나 파란 표식을 단 사람들.

이곳은 오랫동안 잊힌 참사의 피해자들과 그들을 기억하려는 시민들이 만나는 자리, '제1회 슬로우런(Slow Run)'의 현장이었다.

 출발선에 선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 이들은 30여 미터만을 걷고 뒤로 달리는 참가자들에게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출발선에 선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 이들은 30여 미터만을 걷고 뒤로 달리는 참가자들에게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 변상철

'슬로우런'. 이름부터 마라톤의 본질과 상충한다.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심장이 터질 듯 달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도를 늦추고 서로의 숨소리를 확인하며 천천히 뛰거나 걷는 대회. 이것은 단순한 체육 행사가 아니었다. 지난 14년간 숨 쉬는 것조차 투쟁이었던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국가와 기업의 무책임한 속도전, 그리고 사회의 망각에 저항하기 위해 만든 '가장 느린 축제'였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가습기살균제피해회복대책모임'과 함께한 '공익법률센터 파이팅챈스',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 등은 행사를 기획하며 단 하나의 목표를 세웠다. "피해자가 더 이상 병상에 누워 우는 존재가 아니라, 광장으로 나와 시민들과 눈을 맞추는 주체가 되자"는 것이었다.

수증기를 마시며 선 출발선... "시민들과 함께 완주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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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출발선 맨 앞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늦게 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섰다. 폐가 딱딱하게 굳어가는 폐섬유화 환자, 기관지 협착으로 호흡 보조기가 필요한 피해자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출발 10분 전, 참가자들이 몸을 풀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작은 텐트 안에서 '가습기'와 같은 수증기가 흘러나오는 소형 흡입기를 사용하는 피해자가 보였다. 휴대용 네블라이저(전동식 의약품 흡입기)를 사용하는 피해자 김경영씨였다.

남들이 신발 끈을 조이며 근육을 풀 때, 그는 좁아진 기관지를 억지로 열어 숨 쉴 공간을 확보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라도 이 대회에 참여한 시민들과 함께 하고 싶은 것이 바로 피해자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대회 침여를 위해 휴대용 호흡기 치료기를 사용하는 김경영씨
대회 침여를 위해 휴대용 호흡기 치료기를 사용하는 김경영씨 ⓒ 변상철

김씨에게 이번 대회는 목숨을 건 도전이었다. 그는 이 날을 위해 지난 6개월간 집 거실에 러닝머신을 들여놓고 연습을 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걸음이 그에게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고통이었다.

"제가 오늘 시민들과 함께 완주하려고 지난 6개월간 집에서 죽어라 연습했어요. 시민들과 함께 출발선에 서려고요."

 슬로우런에 참가한 참가자들을 응원하는 피해자들
슬로우런에 참가한 참가자들을 응원하는 피해자들 ⓒ 변상철

출발 총성이 울렸다. 김씨는 약속대로 힘겹게 발을 떼었다. 차가운 바람이 폐부로 들어오자 그의 이마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식은땀이 맺혔다. 이날 결승선에서 다시 만난 김씨는 완주했다는 벅찬 감동으로 환하게 웃어보였다.

이날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출발에서 대략 30여 미터의 짧은 거리를 걸어 나간 뒤 주로 밖으로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는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피해자들이 끝까지 달리지 못하는 그 길을 대신 달려주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나도 여기 살아있다'는 무언의 외침이었다.

피해자가 건넨 떡... "이렇게 다정한 대회는 처음이네요"

 달리는 주로의 중간에 피해자들이 준비한 음식들
달리는 주로의 중간에 피해자들이 준비한 음식들 ⓒ 변상철

코스 중간중간과 결승선 풍경은 더욱 낯설고도 뭉클했다. 주로에는 "이 간식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시민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라는 푸른 색의 피켓이 초청장처럼 세워져 있었다.

피해자들은 운영비의 상당 부분을 자비로 털어 과일, 오이, 음료를 준비했다. 특히 결승선에서 만난 피해자 김태윤씨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직접 쪄온 떡이었다. 김씨는 바쁘게 거친 숨을 몰아쉬며 완주하는 참가자들에게 떡을 건넸다. 참기름을 손수 떡 위로 바르며, 때로 손이 모자랄 때는 직접 떡을 떼어 힘들어하는 참가자의 입에 넣어주기도 했다.

"맛있게 드세요. 와줘서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김씨는 연신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한 30대 참가자는 완주 뒤 거친 호흡으로 떡을 바로 입에 넣지 못 했지만, 감동을 받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뉴스를 보며 안타까워하기만 했지 정작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위로를 받아야 할 분들에게 오히려 대접을 받고 위로를 받으니 너무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다정한 대회는 처음이네요."

 달리는 주로에서는 중간중간 버스킹공연도 펼쳐졌다.
달리는 주로에서는 중간중간 버스킹공연도 펼쳐졌다. ⓒ 변상철

가해 기업과 정부로부터 사과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오히려 아무 잘못 없는 시민들에게 "함께 해줘서 고맙다"며 머리를 숙이는 풍경. 이 '뒤바뀐 위로'의 현장은 우리 사회가 이들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기후에너지환경부' 이름 뿐인 후원... 텅 빈 외부인석

따뜻한 시민들의 연대와 달리, 행사장 출발선 풍선에 적힌 '기후에너지환경부'의 이름은 쓸쓸한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가습기살균제 대책모임의 전남병 목사(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에 따르면 이번 행사에 '기후에너지환경부'가 명칭 후원을 허가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행사 당일, 환경부 관계자는 단 한 명도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여야 정치인 누구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고, 무엇보다 18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 기업들은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기업들은 수년째 배상 조정안을 두고 눈치만 보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이날 피해자들이 자비로 떡을 하고 네블라이저를 준비해 걸어야 했던 이유는, 그들이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이 철저히 숨어버렸기 때문이다.

차가운 초겨울 바람보다 더 시린 것은 여전한 '제도권의 무관심'이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그 빈자리를 원망으로 채우는 대신, 시민들의 손을 잡는 쪽을 택했다.

 정부는 그저 명칭만을 후원하였다고 한다.
정부는 그저 명칭만을 후원하였다고 한다. ⓒ 변상철

기록이 아닌 '기억'을 위한 레이스

대회는 큰 사고 없이 마무리됐다. 해가 중천에 뜨자 얼어붙었던 땅도 녹았다. 5km, 10km를 완주한 시민들은 기록증 대신 예쁜 나무 메달과 피해자들이 건네는 따뜻한 바나나 하나를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갔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완주자들에게 떡과 간식을 나누고 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완주자들에게 떡과 간식을 나누고 있다. ⓒ 변상철

이날 상암동 평화공원에서 확인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옆 사람의 숨소리를 듣는 것. 아픔을 가진 이들이 고립되지 않도록 곁을 내어주는 것.

행사가 끝날 무렵, 함께 행사의 뒷정리를 하시던 류순권 목사(한국교회 인권센터)는 시민들의 적극적 호응에 기뻐하며 말했다.

"우리가 이런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정부가 봐주기를, 기업이 인정하기를 그렇게 바랐는데 그런 날은 오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이제는 기다리지 않고 우리가 시민 속으로 다가갈 겁니다. 오늘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걸 증명한 날입니다."

제1회 슬로우런은 끝났지만, 피해자들의 레이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들의 걸음은 느리다. 때로는 30미터 만에 멈춰 서서 숨을 골라야 한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이제 그 거친 숨소리에 귀 기울이고 보폭을 맞추는 일은, 살아남은 우리 모두의 몫으로 남겨졌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변상철씨는 공익법률지원단체 '파이팅챈스' 국장입니다. 파이팅챈스는 국가폭력, 노동, 장애, 이주노동자, 환경, 군사망사건 등의 인권침해 사건을 주로 다루는 법률 그룹입니다.


#파이팅챈스#가습기살균제#슬로우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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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뒷이야기 : 공익법률지원센터 파이팅챈스 백브리핑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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