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화폐 발행을 독점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일까.
미제스(Mises)와 하이에크(Hayek)로 대표되는 오스트리아학파는 국가가 주물러온 화폐 운영체계를 기만과 사기의 역사라고 진단한다. 화폐 제도란 사람들이 자발적 합의를 통해 운영되어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국가가 강제 개입하는 바람에 화폐 금융 질서가 망가졌다는 것이다.
이들이 건강한 금융 질서를 망치는 주범으로 지목하는 대상이 은행이다. 신용을 공급하는 상업은행이 실물경제 크기를 넘어서는 과도한 부채(=대출)를 남발해 국민경제를 '좀비' 상태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신용 팽창으로 인한 통화량 증가가 자산 거품을 일으키고, 금융위기를 촉발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건 이미 확인된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나라 민간 신용 대비 GDP 비율 (1960∼2023)민간 신용은 가계 신용과 기업 신용의 합계 수치임 ⓒ 세계은행
이 그림은 지난 60년간 우리나라의 민간 신용 대비 국내총생산(GDP) 비율을 나타낸 것이다. 민간 신용이란 가계와 기업이 빌린 부채의 총량을 말한다. 대략 2000년을 기점으로 GDP를 넘어선 것을 알 수 있다. 부채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2023년 기준, 두 수치의 비율은 176.1이다. 한 해 동안 우리나라 국민이 창출한 생산물 합계보다 1.7배 많은 돈이 대출되었다는 뜻이다.
생산 즉 소득은 소비와 저축의 합이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대출은 GDP를 넘어설 수 없다. 대출이 GDP를 넘어섰다는 건 저축에 의존하지 않고 신용을 창출했다는 의미다. 신용 과잉(credit overhang) 상태다. 과도하게 공급된 대출은 부동산이나 주식 등 자산시장으로 흘러들어 거품을 만든다. 실물 가치를 넘어서 형성된 거품은 꺼지기 마련이고 거품이 꺼지는 순간, 경제는 위기에 빠진다.
금융이 실물경제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성장을 방해하는 '독'으로 작용하는 구조. 부채 의존 경제(debt economy)의 민낯이다. 이 궤도에서 벗어나려면 대출 총량을 GDP 기준 아래로 낮춰야 한다. 하지만 현재 작동되는 금융 구조에서 이를 실현하기란 불가능하다. 돈을 찍어 돈을 버는 은행이 스스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일 가능성은 영(zero)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은행이 예금을 전제로 대출을 발생시킨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대출은 예금과 상관없이 무(無)에서 창출된다. 예금 먼저 대출 나중이 아니라, 대출을 발생시킨 후 부족한 준비금을 중앙은행에서 빌리는 순서로 진행된다. 국민경제에서 유통되는 돈의 대부분은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돈(본원통화)이 아니라, 은행들이 대출을 통해 만들어낸 예금통화(신용통화)다.
금융은 수시로 위기를 동반한다. 20세기가 시작된 이래 현재까지 총 12차례의 금융위기가 있었다. 이 위기들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흐름이 하나 있는데, 바로 자산 거품이다. 자유화 혹은 규제 완화의 흐름을 타고 금융회사들이 과도한 신용을 공급했고, 자산시장으로 흘러간 돈이 거대한 거품을 형성했고, 임계점을 넘자 터져버린 것이다. 지금도 이 공식은 유효하다.
최근 발흥하고 있는 가상자산, 가상화폐는 현대금융이 지닌 태생적 한계와 부조리를 극복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됐다. 성실하게 일하던 시민들이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하고 빚더미에 깔린 자영업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위기를 초래한 금융회사는 세금으로 구제받는 모습을 바라보며 낡은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구조를 짜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비트코인(Bitcoin)을 개발한 이가 누구나 열람할 수 있고, 누구도 조작할 수 없으며, 화폐량도 제한된 '탈중앙화된' 화폐 시스템을 창안한 배경이다. 오스트리아학파와 가상화폐는 '국가가 화폐를 독점하는 것은 부당하며 민간이 주도하는 자유로운 화폐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라는 믿음을 공유한다. 블록체인 기술이 이 이념을 실현하는 핵심 도구로 기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통화 남발을 막기 위해 수량을 한정한 것은 희소가치를 높여 가상자산 가격을 천정부지로 끌어올리는 촉매제로 기능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디지털화폐의 편익을 함께 누리자는 아름다운 이상은 사라지고 가상자산이 투기의 대상으로 변질되고 있는 형국이다. 하루에도 널뛰기하듯 가격이 수시로 변동하는 자산은 화폐가 될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선수가 스테이블코인이다. 실물화폐와 1:1로 가치를 연동하면서도 블록체인의 투명성을 겸비한 '안전한' 돈이라는 인식이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코인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다. 사람들은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길 바란다. 법정화폐가 이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거라는 믿음이 흔들리면 금이든 코인이든 '대체재'를 찾기 마련이다.
가상자산 혹은 디지털화폐가 주류가 되면 위기 없는 '건강한' 금융 질서가 만들어질까.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자산 거품은 신용 과잉 때문에 발생하고, 이 사태를 방지하려면 신용의 총합이 GDP를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스테이블코인은 발행량에 제한이 없다. 이 코인이 GDP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도록 하려면 엄격한 통제가 필요하다.
민간에서 자율적으로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발행업자의 이익은 화폐 발행량에 비례한다. 많이 만들수록 이익도 커진다. 코인 발행업자가 1:1 담보 원칙을 깨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통화량이 폭증하게 된다. 이 돈들은 가상자산은 말할 것도 없고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시장으로 흘러갈 것이다. 익숙한 장면이다. 이후 어떤 양상이 전개될지는 설명이 필요치 않다.
화폐 제도를 민주적으로 개혁하자는 좋은 의도에서 출발한 가상화폐도 경제를 망가뜨릴 수 있음을 알려준다. 국가가 이 상황을 방치할 리 없다. 가상화폐 예찬론자가 어떤 세상을 꿈꾸든, 화폐 질서를 유지할 힘은 국가에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국가의 도움 없이는 '건강한' 화폐로 자리 잡을 수 없다. 국가 간섭 없이 독립적 화폐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은 현실성이 낮고 위험해 보인다.
통화의 과잉 공급에 따른 위험 측면에서 보면, 은행이나 가상화폐 발행업자나 차이가 없다. 제도화된 위험(=은행)보다 제도권 밖에 있는 위험(=가상자산)이 더 큰 문제를 만들지 모른다. 누가 화폐를 만들건, '생산(소득)=소비+저축'이라는 거시경제학의 기본 공식을 준수하면서 대출 총량을 규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지점을 놓치면 심각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일부 학자는 신용 과잉으로 인한 폐해를 막을 방안으로 '통화(currency)와 신용(credit)의 분리'를 주창한다. 통화 공급은 정부가 담당하고 신용중개기관은 돈의 대출을 중개하는 구도다. 오직 국가가 발행하는 본원통화(M0)를 통해서만 금융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선한 발상이다. 민간 은행에 맡긴 신용창조 기능을 회수해 정부가 통화 공급을 독점하면 대출 과잉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가설을 구현할 방법이 있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활용하면 된다. 은행이 금융 질서를 훼손하는 주범이라는 오스트리아학파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이고, 가상화폐의 핵심 기술인 블록체인을 활용해 새로운 디지털화폐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 가설이 현실화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현실의 금융 생태계를 지배하는 자들이 이 구상을 찬성할 리 만무하다.
'스테이블코인은 틀렸고 중앙은행 디지털화폐가 맞다'라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디지털화폐 생태계는 미지의 땅이다. 확인된 것보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충분한 검토와 준비를 거친다 해도 보이지 않는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전제를 무시한 상상력과 토론, 실험이 필요하다.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규율하는 법률 제정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가상자산 시장 선점을 노리는 업계 공룡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최근 국회와 정부, 한국은행의 견해 차이로 가상자산에 대한 입법화가 지연되는 조짐이 나타나자 '첩첩산중'이니 '하세월'이니 등의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가상자산을 다루는 기사 어디에도 신용 과잉 문제를 다룬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주식시장이 활황을 띠면서 시중의 유동자금이 주식시장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정부도 투자를 권유하고 있다. '빚으로 주식 투자하는 걸 잘못이라고 볼 순 없다'라는 정부 관료의 발언이 화제다. 물가는 오르고 지갑은 얇아지고 있다. 물가 상승과 재정 악화는 투기 심리를 자극한다. 코인 시대(the age of cryptocurrency)가 본격화되면 부채 과잉이 가속화될 것이다. 위기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문진수 기자는 사회적금융연구원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