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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늦은 오후, 두꺼운 외투를 여며야 했던 을지로. 낮 내내 쇠를 깎고 유리를 가는 소리로 요란했던 골목에 정적이 찾아오나 싶더니, 이내 노래 소리와 함께 묵직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홀린 듯 소리를 따라 좁고 허름한 골목에 들어섰다. 접이식 테이블에 앉아 편육과 막걸리를 즐기는 어르신들의 일상을 지나 골목 끝에 다다랐다. 그렇게 우리를 홀린 진동의 진원지 앞에 섰다. 그리곤 기자의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11월 7일, 서울 을지로4가 산림동 공터에서 열린 제2회 을지팝업 갤러리 오프닝 공연 ⓒ 정재훈
눈앞에 펼쳐진 곳은 폐허가 된 공터였다. 지붕도 없이 뻥 뚫린 하늘, 울퉁불퉁한 바닥, 앙상하게 남은 벽. 그 황량함의 한가운데서 밴드가 노래하고 있었다. 울불툴퉁한 바닥 위에 놓여진 의자와 식탁은 높이가 맞지 않아 기울어 있었고 그 마저도 자리가 부족해 서 있어야 했지만, 관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밴드를 빙 둘러싼 채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제2회 을지팝업 갤러리의 오프닝 공연 현장. '을지팝업 갤러리'는 을지로 골목 전체가 하나의 갤러리가 되는 일종의 사진 축제다. 깔끔한 전시장 대신 공장 외벽, 부서진 건물의 잔해, 군데 군데 구멍이 뚫린 벽에 사진이 걸린다.
이번 전시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도를 넘어, 시간과 공간을 재구성하는 예술의 힘을 드러낸다.
벽면에 붙은 문구의 의미가 궁금해 성남훈 제2회 을지팝업 갤러리 총감독에게 물었다. 그는 말없이 공연장을 가리키며 짧게 답했다.
"음… 이거요."
재개발이 가시화되며 부서지고 사라져가는 을지로. 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그저 슬퍼하기보다 '예술'이라는 방식으로 공간과 시간을 재구성하고 있었다. 남들은 외면할 폐허에서 노래하고, 마시고, 웃으면서. 최근 재개발 이슈와 맞물려 핫해진 종묘. 그 종묘 맞은편에서 또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온 을지로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렇게 을지로 내래이터, 고대웅 작가를 만났다.

▲을지로 전경 ⓒ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공공누리
을지로의 내레이터, 청두(淸豆) 고대웅
이 긴 여정의 시작점에 서 있는 사람. 기자를 을지로의 깊숙한 골목으로 안내해 준 해설자, '청두(淸豆)' 고대웅 작가. 그의 호인 청두는 '맑은 콩'을 뜻한다. 척박한 땅에 질소를 공급해 비옥하게 만드는 콩처럼,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가 담긴 이름이다.
고 작가는 2016년, 현대미술 작가로서 을지로에 첫발을 디뎠다. 저렴한 임대료, 구하기 쉬운 재료, 그리고 무엇보다 상상하는 것을 바로 실현해 주는 제작 인프라에 매료되어 자리를 잡았다. 처음엔 조용히 자신의 작업만 할 줄 알았는데, 그는 '커뮤니티'를 그리기 시작했다. 을지로의 기술 장인과 예술가가 어우러지는 축제를 기획하고, '을지예술센터' 운영에 참여하며 민(民)과 관(官), 예술과 기술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어 왔다.
덕분에 그는 을지로에서 마당발로 통한다.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은 기술 장인부터, 힙한 카페 사장님 그리고 구청 공무원까지. 이질적인 그들이 고대웅이라는 교차점에서 만나 형님이 되고 동생이 된 광경을 자주 목격했다. 이런 그를 두고 도시건축정류소 이재원 소장은 '을지로의 포털(Portal)'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척박해 보이는 재개발의 땅, 을지로를 사람 냄새 나는 비옥한 땅으로 일궈내고 싶었던 '청두' 고대웅 작가. '을지로 포털' 고대웅을 타고, 을지로가 쌓아 올린 문화적 자산들을 차례로 탐색해본다.
오늘 살펴볼 을지로의 문화적 자산은 '중첩의 미학'이다. 입체적인 사람들이 모여 만든 입체적인 도시 '을지로'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을지로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유진 작가(10월 27일), 을지로 카페 알렉스룸의 한승보 대표(10월 29일), 이현종 작가(11월 7일)의 인터뷰를 기사로 담았다.
만만찮은 사장님과 만만찮은 예술가가 만나면?

▲전유진 작가(왼쪽)와 고대웅 작가(오른쪽) ⓒ 정재훈
2016년 을지로와 인연을 맺은 전유진 작가는 소리와 기술을 함께 다루는 미디어 아티스트다. 기존 악기를 연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술을 활용해 독창적인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의 작업 방식이다.
그런 그에게 오디오 수리 장인과 금속 가공 기술자들이 모여 있는 을지로는 '프로토타이핑(시제품 제작)에 최적화된 공간'이었다. 그는 "다른 공단들은 대량 생산 위주라 소량 제작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을지로는 작업장 규모가 1~2평으로 작아서, 작은 부품 하나, 실험적인 시도 하나도 빠르게 만들어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모든 일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업해 온 사장님들과 손발을 맞추는 게 젊은 작가들에게는 쉽지 않았다고. 전유진 작가도 마찬가지. 기술을 모른다고 무시를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아침 첫 손님이 여자면 재수 없다"며 소금을 맞은 적도 있었다.
주눅 들고 포기할 만한 순간이었지만, 전유진 작가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사장님들의 언어'인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레이저 커팅이 무엇인지, 절곡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장님들이 알아볼 수 있는 도면은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를 치열하게 배웠다. 사장님들이 불친절한 데에는 단순히 성차별적인 면도 있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함'도 컸을 거라는 게 전 작가의 생각이었다.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을지로의 기술력이 반드시 필요했던 전유진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요구하고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사장님들의 기술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2024년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 작가의 테크니션인 이정성 장인을 모시고, 진행했던 해킹의 기술.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은 이정성 장인과 함께 아날로그 TV를 해킹해 비디오 아트를 만들어 봤다. 이제는 쉽게 보이지 않는 아날로그 TV를 열고, 그 속에 숨은 코일, 빔, 수직선/수평선 등을 살피며 이정성 장인의 표현처럼 “TV를 일부러 고장내 보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 현준영/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
그렇게 탄생한 것이 '여성을 위한 열린 기술랩'이다. 거칠고 배타적인 환경에서 자신과 같은 여성 창작자들이 상처받지 않고 작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든 노력이었다. 이런 치열한 노력은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 '생존'을 위해 시작한 그의 공부가, 어느새 을지로의 문턱을 낮추는 '사다리'가 된 것이다. 을지로의 거친 현장 기술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강원도에서 오시는 분들도 계셨어요. '여기 아니면 배울 곳이 없다'면서요."
특히 을지로의 금속 가공 공정을 5주 만에 마스터하는 '멜팅 메탈즈(Melting Metals)' 워크숍은 경쟁률이 무려 70대 6에 달했다. 참가자들은 컴퓨터 앞을 벗어나 직접 도면을 들고 공장을 찾아가고, 레이저 커팅과 절곡, 분체 도장까지의 과정을 장인들의 어깨너머로 배웠다.
그렇게 을지로는 단순히 물건을 찍어내는 공장을 넘어, 기술과 경험을 전수하는 '거대한 학교'가 됐다. 투박한 기술 장인과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분투했던 한 여성 예술가,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충돌하고 비벼지며 만들어낸 이 뜨거운 배움의 열기는 을지로가 빚어낸 새로운 문화적 자산이 된 셈.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이제 전유진 작가는 사장님들이 알아볼 수 있는 도면을 직접 그려갈 수 있게 됐다. 이런 그의 노력과 성장을 지켜본 사장님들 중에는 다른 일 제쳐두고 전 작가 작업부터 해주시는 사장님도 생겼다. 도면을 쓱 보더니 "두고 가"라는 말로 "만들어줄게"를 대신하는 사장님들도 늘어났다. 여전히 투닥거리는 부분이 있지만, 서로가 나름의 방식으로 존중과 공존을 모색하며 시간을 쌓아가는 중이다.
공장 기계음에 일렉트로닉 비트를 얹으면?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이 만들어낸 새로운 가치는 예술로 표현되기도 한다. 철공소에서 나는 날카로운 기계음과 여기에 얹어진 일렉트로닉 음악이 그랬다. 2021년, 공장들이 문을 닫은 을지로 저녁. 철공소 골목에서는 공장의 기계음에 일렉트로닉 음악을 더해진 공연이 열렸다. 일명 '도시열섬' 프로젝트.

▲2021년 열린 도시열섬 프로젝트 한 장면. 공장이 쉬는 저녁이 되자, 철공소는 디제잉 무대로 변하고 거리에는 젊은 사람들이 헤드폰을 끼며 비트를 느끼기 시작했다. ⓒ 을지예술센터
프로젝트를 준비했던 고대웅 작가는 "보이지 않지만 뜨겁게 쌓여있는 도시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풀어내려는 기획"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도시에는 열(Heat)이 쌓이듯, 사람들이 행한 모든 노동과 활동의 에너지가 사라지지 않고 다른 형태로 전환되어 쌓여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라며 "이렇게 쌓여있지만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예술을 통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형태로 바꾸어보고 싶었다. 철공소의 기계 소리 등을 채집해 디제잉 음악으로 변환하거나 거리에 스모그를 채워 열에너지가 꽉 찬 상태를 시각적으로 연출한 것 모두 이런 기획 의도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이현종 작가를 만났다.
음악과 미술을 아우르며 활동해 온 이현종 작가는 골목을 돌아다니며 철공소에서 나는 날카로운 기계음들을 녹음했다. 쇠를 깎는 소리, 드릴이 돌아가는 소리, 금속이 부딪히는 파열음 등 남들에게는 그저 시끄러운 '소음'이었던 것들을 음악의 소스로 삼았다. 그리고 이 거친 소리들을 하우스나 테크노 같은 일렉트로닉 비트 위에 얹었다. "둥 둥 둥 둥" 울리는 베이스 소리 사이로 "띠~ 띠~ 치~ 치~" 하는 드릴 소리가 리듬처럼 끼어들었다. 산업 현장의 소음이 가장 현대적인 춤곡의 리듬과 결합하는 순간이었다.

▲이현종 작가(왼쪽)와 고대웅 작가(오른쪽) ⓒ 정재훈
"철공소 사장님들이 불편해 하시지는 않았나?"라고 묻자 이현종 작가는 "그럴 줄 알았은데, 오히려 너무 잘 즐기셔서 놀랐다"고 답했다. 시끄럽다며 민원을 넣을 줄 알았던 동네 어르신들과 사장님들이, 오히려 이 비트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젊은 친구들이 듣는 테크노나 펑크 음악에 맞춰서 사장님들이 같이 춤을 추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면서 "작업복을 입은 채로, 마치 뽕짝 춤을 추듯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젊은 예술가들의 테크노 비트와 기존 철공소 어르신들의 트로트(뽕짝) 정서가 충돌하지 않고, 술 한 잔과 춤으로 기묘하게 섞이는 풍경 속에서 어르신들은 가게 불을 켜두고 함께 춤을 추거나 안주를 나눠 먹으며 이 낯선 축제의 일원이 됐다. 소음이 음악이 되고, 배척이 유희가 되는 현장을 보면서 이현종 작가는 "서로 다른 것들이 충돌하고 비벼지며 만들어낸 을지로만의 독특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시간의 두께, 그게 을지로의 자산
을지로가 쌓아온, 복잡한 시간의 층위(layer)를 누구보다 깊이 들여다본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카페 '알렉스룸'을 운영하는 한승보 대표다. 그는 오래된 공장 지대를 둘러싼 단순한 향수나 노스탤지어가 아닌, 을지로만의 입체적인 문화적 가치를 강조하며 현재 진행 중인 전면 철거식 재개발 방식에 대해 강한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한 대표가 을지로에 처음 매료된 시점은 이곳의 낮과 밤이 극적으로 바뀌는 오후 7시였다. 낮에는 쇠를 깎는 소리와 기계음으로 가득한 산업 현장이지만, 셔터가 내려가는 순간 골목은 조명과 사람들로 채워진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했다. 그는 이 이질적 시간의 공존이야말로 을지로의 본질적 매력이라고 설명한다.
이 매력은 세 겹의 시간으로 구성된다. 첫째, 30~40년간 한 자리를 지켜온 소공인들의 묵묵한 시간. 둘째, 저렴한 임대료와 제조 인프라를 기반으로 이곳에 정착한 예술가들의 창작의 시간. 셋째, 이러한 복합적 분위기에 이끌려 들어온 카페·와인바 등 새로운 상인들의 시간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브랜딩을 담당했던 그는 이 세 층위가 서로 밀어내지 않고 공존하는 모습을 "자본으로는 절대 재현할 수 없는 진짜 명품"이라고 강조한다. 그에게 명품의 기준을 묻자 "돈으로 살 수 없는 '시간의 두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공장에서 찍어낸 매끈한 새 가방보다 장인의 손때와 시간이 묻어나는 가방이 진짜 럭셔리인 것처럼, 을지로는 소공인들이 30~40년간 다져온 시간 위에 예술가들의 시간이 얹어지고, 다시 그 위에 상인들의 시간이 겹쳐진 곳입니다. 자본이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 인테리어를 '레트로'하게 꾸민다 해도, 실제 40년의 세월이 만든 이 단단한 지층을 '복붙(복사+붙여넣기)' 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는 "기업들이 수천억, 수조 원을 들여 억지로 만들고자 하는 '브랜드 스토리'가 이곳에서는 자연스럽게 쌓여 있다"고 말했다.

▲한승보 대표(왼쪽)과 고대웅작가(오른쪽) ⓒ 정재훈
그래서 그는 을지로가 쌓아온, 시간의 층위를 인정해주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속상하다. 그는 "런던의 쇼디치가 쇠락한 공업지대를 재생해 영국에서 힙한 지역이 되고 나아가 세계적 문화 지역으로 거듭난 것처럼, 세계의 도시는 '재생'을 미래 전략으로 삼고 있다"면서 "(오래된 것을 불편하다고) 싹 밀고 새로 짓는 신도시식 모델을 반복하는 건 아쉽다"고 말했다.
"1조원짜리 건물을 짓겠다는 거 좋은데, 을지로가 쌓아온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제대로 평가는 해야하지 않을까요? 만약에 을지로가 2조원짜리 가치라면, 아무리 1조원짜리 주상복합이 가치가 크다 한 들 그건 손해잖아요."
한 대표는 지금의 재개발 방식은 브랜드·문화·도시의 지속 가능성 관점 모두에서 '가장 비싼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며 우려했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도시의 오래되고 낡은 것들을 '빈곤'한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가장 현대적인 가치인 '스토리'와 '시간'을 품은 대체 불가능한 미래 자산이라고 평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길 바라본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연희문고와 월간 작은도시이야기 뉴스레터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