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5.11.26 10:55최종 업데이트 25.11.26 10:55

집에서 10분, 황토 맘껏 밟던 아이가 한 말

서귀포 숨골공원 '어싱광장'에서 보낸 시간들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제주에 살면 자연이 늘 곁에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육아와 일상 속에서는 그 자연마저 쉽게 닿지 못했다. 아이 둘과 함께 산과 바다를 찾는 일은 거창했고, 바쁜 일상 속에서 자연은 오히려 멀어졌다. 지난 11월 하순, 집에서 10분 거리의 숨골공원에서 황토 어싱광장을 만났다. 신발을 벗는 순간, 멀리 있는 줄로만 알았던 자연이 조용히 나에게 걸어왔다.

찰박찰박, 어싱광장

서귀포 혁신도시 한가운데 자리한 숨골공원은 처음엔 그저 평범한 산책로처럼 보였다. 아파트와 도로 사이에 얇게 놓인 녹지 공간, 그 이상의 역할을 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과 산책을 하던 중 습지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붉고 넓은 황토빛 들판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자연이 도시 한복판에 작은 흔적을 남겨둔 것처럼, 선명하고 따뜻한 색이었다. 이곳이 바로 '어싱(Earthing) 광장'이다.

AD
이 공간은 2023년 조성된 맨발걷기 공간이다. 말 그대로 땅을 직접 딛고 지구의 에너지를 전달 받는 경험을 의도하고 만든 곳이다. 집중 호우 때 침수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성된 저류지의 일부를 활용해 만든 공간이라고 한다. 비가 온 뒤엔 습지에서 스며든 물기가 황토 위로 얇게 차오르고, 맨발로 걸으면 발바닥이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저항을 느낀다.

누군가에게는 차갑고, 누군가에게는 아릿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건드리는 감촉일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신발을 벗고 흙을 밟아보려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개장 이후 하루 평균 300명 이상이 찾는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단순한 체험장이 아니라 조용한 '힐링' 명소로 자리 잡은 셈이다.

서귀포 어싱광장의 황토빛 들판 모습. 어싱광장은 단순한 체험장이 아니라 조용한 힐링 명소로 자리 잡았다.
서귀포 어싱광장의 황토빛 들판 모습.어싱광장은 단순한 체험장이 아니라 조용한 힐링 명소로 자리 잡았다. ⓒ 이현숙

발바닥이 기억하는 황토의 감촉

멀리 갈 필요도, 큰 마음을 먹을 필요도 없었다. 그냥 신발을 벗으면 그곳이 곧 자연이었다. 아이들은 먼저 황토로 미끄러지듯 올라갔다. 축 들어가는 소리, 흙이 무너지며 흩어지는 감각을 온몸으로 즐기며, 아이들은 금세 웃음을 터뜨렸다. 토끼 조형물 옆에서 아이들은 끝없이 뛰고 또 뛰었다. 그 작은 토끼들은 마치 아이들의 놀이를 묵묵히 지켜주는 안내자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황토의 온도는 차갑지만, 보드라운 촉감이 꼭 벨벳을 덮은 듯 하다. 신발을 벗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지켜보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대신 아이들이 흙을 만나며 변화하는 표정을 천천히 바라보고 싶었다. 남편은 아이들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걷고 있었다. 발바닥에 닿는 촉촉함을 처음엔 어색해 하더니 아이는 이내 익숙해졌다.

"처음엔 발이 시렸는데, 진짜 재밌었어요!"

여섯 살 아이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황토를 깊게 밟았다 뺐다 하며 자기만의 놀이를 찾아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깨달았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각자의 시간을 만들고 있었고, 나도 그 곁에서 천천히 나만의 시간을 되찾고 있었다. 그 조용한 균형이 참 고요하고 좋았다.

어싱광장을 품은 숨골공원 모습. 도심 속에서 만나는 숨결 같은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공원.
어싱광장을 품은 숨골공원 모습.도심 속에서 만나는 숨결 같은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공원. ⓒ 이현숙

각자의 시간이 있는 곳

아이들이 아빠와 함께 황토 위를 걸으며 웃고 있을 때, 나는 조금 떨어진 그늘에서 뜨개질을 이어갔다. 반복되는 손놀림 속에서 마음도 천천히 풀렸다. 어싱광장은 우리 모두에게 함께 있으면서도 각자의 시간을 지킬 수 있는 공간이었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좋았다. 계획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 황토 들판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각자의 속도를 찾았다. 집으로 돌아온 뒤, 아이 발톱 사이에 고여 있던 오렌지 빛 황토가 남긴 흔적을 보았다. 쉽사리 씻기지 않는 그 작은 색이 마치 오늘이라는 하루가 아이에게 선물처럼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조용히 웃음이 났다. 애쓰는 하루 속에서도 이런 소소한 기쁨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숨골공원#어싱광장#제주살이#서귀포생활#황토맨발걷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제주로 이주해 두 아이를 키우며 삶을 기록하는 엄마입니다. 도시 부모들의 로망과 현실, 육아와 배움의 이야기를 글로 전합니다. 생활 속에서 찾은 진짜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