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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끝과 겨울의 시작이 겹을 이룬 풍경으로 옮겨간다. 뒤늦게 물이 올라온 단풍나무는 여전히 붉은 빛으로 말라가고 몇몇 나무에는 아쉽다는 듯 노랗고 붉고, 갈빛의 잎사귀가 헐겁게 매달렸다. 군데군데 잎을 떨구고 빈 몸으로 선 앙상한 나무들도 보인다.

언제부턴가 가지만 남은 나무를 보면 경건한 마음이 떠오른다. 숨겨주는 보호색이나 꾸며주는 잎사귀도 없이 본연의 형태로 꿋꿋한 것 같아서다.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이 부는 시린 시간을 가림막 없이 버틴다. 그 시간이 나무를 더욱 굳세게 할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 모습은 내면이 단단한 사람을 닮았다. 세상의 시선과 말에 휘둘리지 않고 잠연히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 자기만의 가치로 춥고 어두운 삶에서도 끝내 꺼지지 않는 불을 밝히는 사람. 최근 <무용해도 좋은>(2025년 10월 출간)이라는 책을 읽으며 이 책의 저자인 유재은 작가도 그런 사람이겠구나 생각했다.

마흔 넘어 시작한 꿈을 응원해 준 책

<무용해도 좋은> 빛으로 헤아린 하루의 풍경, 유재은, 책과나무, 2025
<무용해도 좋은>빛으로 헤아린 하루의 풍경, 유재은, 책과나무, 2025 ⓒ 책과나무

"빛으로 헤아린 하루의 풍경"이라는 부제처럼 매일 마주한 반짝이는 순간과 감정을 '빛'으로 풀어낸 책이다.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빛을 포착하고 내면의 움직임을 헤아려 빛깔에 꼭 맞는 이름을 붙여준 작가의 섬세한 시선이 돋보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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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온 저자의 내력이 그의 언어 감각을 세공해주었음을 알아채는 건 목차에서부터다. '살아내다', '걷다 보면 길이 된다', '샘밑이 되다', '반짝이다'라는 동사로 각 장에 제목을 달고, 그 안에 세상을 구성하는 다양한 빛의 이름을 모아 두었다.

잿빛, 하늘빛, 분홍빛처럼 익숙한 색부터 거먕빛(검불은 빛), 꼭두서닛빛(붉은빛), 갈맷빛(짙은 초록색), 약댓빛(연한 갈색), 이사빛(따사로운 햇볕)처럼 궁금증을 자아내는 빛까지 가득하다. 우리 곁에 이토록 다채로운 빛이 있고, 내면엔 이토록 풍성한 감정이 살고 있음에 책을 읽기 전부터 감탄하게 된다.

어제와 다를 것 없이 무료하고 고된 일상에서도 자신만의 쪽빛으로 눈부신 사람이 되는 길을 베포의 도로 위에서 배웁니다. 우리가 비질하고 있는 이 순간들이 모여 끝내 인생이 되겠지요. - <무용해도 좋은> 59쪽

글쓰기 교사로, 두 딸의 엄마로 바쁜 생활에 쫓기던 저자는 마흔 중턱을 지나며 '읽고 쓰는 삶'을 다시 꿈꾸게 되었다고 한다. 블로그에 쓴 독서 에세이(<종이책의 위로 (프로방스, 2018)>)로 첫 책을 내고,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원고를 꺼내 동화 작가로 등단한다. 첫 책과 작가 등단의 기쁨도 잠시, 한동안은 투고 실패로 어두운 터널 같은 길을 걷는다.

글쓰기에 매달리기에도 부족한 시간을 쪼개 아이들을 가르치고 생활을 꾸리는 삶에 지치면서, 꿈의 날개가 한없이 젖어 늘어졌던 시간도 있었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하지만 저자는 삶에 치일 때마다 책으로 돌아가 지혜를 구하고 삶에서 중요한 가치를 꼽는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 나누는 삶의 의미를 헤아리면서 자신을 토닥인다. 그러면서 꿈이 목적인 삶이 아니라 꿈을 내내 그리다 서서히 꿈을 닮아가는 삶을 향해간다고 씩씩하게 적는다.

 저자의 목소리에 공감한 문장들.
저자의 목소리에 공감한 문장들. ⓒ lilartsy on Unsplash

나 또한 마흔 중반을 향하며 오랜 꿈이었던 글쓰기와 독서로 삶의 중심을 옮겼던 터라 저자의 목소리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가 나의 심경을 대신하여 다정한 언어로 풀어 적어준 것 같아 책을 읽는 동안 미소 짓게 되는 때가 많았다. 특히 이런 문장 앞에서는.

"조금 빠르거나 다만 늦게 이루어질 뿐, 걷다 보면 길이 됩니다. -70쪽"

마음의 빈자리로 흘러 들어온 문장이 꼭 필요했던 온도로 나를 데워주었다.

이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나는 삶에 있어 용감해지고, 하고 싶은 일을 향해 더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짙은 밤의 시간을 통해 행복은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욕심을 내려놓고 묵묵히 걸으며 매 순간의 반짝임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 199쪽

이 책에는 저자의 기억 속에 잠자는 어릴 적 추억과 소중한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크리스마스 트리의 알전구처럼 총총 박혀 반짝거린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홀로 삼 남매를 정성껏 보살핀 어머니, 그리고 첫사랑으로 만나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서도 변함없이 믿고 의지하는 남편, 이제 성인이 된 두 딸, 그들과 함께한 빛과 같은 순간들이 하나하나에 아로새겨 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며 저자는 자신에게 귀한 걸 알아보고 색색의 포장지로 감싸 보석함에 고이 간직하는 사람, 그래서 인생의 보물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추억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처럼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이 뿌리가 깊은 사람이 된다는 것도.

지나온 삶과 곁의 사람들과 관계를 인정하고 포용하면서, 그것의 가치를 귀히 새길 줄 알 때 우리의 내면은 소유와 상관없이 충만해지는 게 아닐까. 그때 비로소 외부의 자극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본연의 모습으로 단단하게 설 수 있는 게 아닐까. 잎을 다 떨구고 빈 몸으로도 꿋꿋한 겨울나무들처럼. 그러니 내겐 이 책의 저자가 그런 어른으로 빛나 보였다.

"어른이란 무엇일까요(182쪽)."

그가 건넨 문장에 머물며 스스로 답해 보았다. 언제든 자신의 감정을 띄워 올려줄 수 있는 달콤한 순간의 기억을 잘 모아 둔 사람. 넉넉한 내면으로 검소한 차림으로도 빛이 나는 사람, 보이지 않는 감정을 세심히 헤아리는 시선으로 온기를 전하는 사람, 자기 일에 성실함으로 자부심을 지닌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과 곁에 있는 사람들을 믿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어른이 되기 위해 저자처럼 내면을 푸지게 키우고 싶다. 내면을 가꾸는 일에는 독서와 글쓰기만 한 게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받았던 사랑을 잘 품고 다듬어 무럭무럭 키워나가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책장을 덮고는 내 안의 사랑을 잘 돌보고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꿈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삶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소중한 것이 무언지 잠잠히 헤아려보게 해주는 책, <무용해도 좋은>. 책을 읽으며 자기만의 가치를 톺아보는 사이 특별한 것 없는 나의 삶과 사랑도 긍정하게 될 것이다.

"지금 나는 금빛 시절을 사는 거예요. 이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 소망하는 미래를 이루고, 먼 훗날 돌아볼 귀한 추억이 바로 오늘이니까요(196쪽)"

저자의 목소리가 독자의 내면으로 옮겨와 시선을 이끈다. 우리 앞의 사소한 순간에서 새어 나오는 금빛을 놓치지 말라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무용해도 좋은 - 빛으로 헤아린 하루의 풍경

유재은 (지은이), 책과나무(2025)


#무용해도좋은#유재은#책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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