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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로 이주한 뒤, 귤은 더 이상 겨울철 간식이 아니었다. 아이 둘을 키우며 보내는 이 곳 제주의 계절 속에서 귤은 누군가의 하루였고, 생계였고, 오래 쌓인 시간의 향을 머금은 열매였다. 그래서 감귤박물관 20주년 특별전 소식을 들었을 때, 단순히 귤 체험을 하는 날이 아니라, 제주 사람들의 삶을 다시 배우는 시간이 될 것 같았다. 그 예감에 기대 지난 15일 우리는 가족 모두의 손을 잡고 감귤박물관으로 향했다.
오래된 삶의 결을 읽다
참여자들에게는 체험 전에 프로그램 담당자가 직접 전시 설명을 해주는 특별 안내가 진행되었다. 정식 도슨트 투어는 아니었지만, 담당자의 설명은 오히려 더 담백했다. 작품 하나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여기에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하고 덧붙이는 말들은 작은 조명처럼 전시를 밝히기 시작했다. 처음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조형물들은 '그저 예쁘다' 정도의 감상이었다.
"감귤은 다섯 감각으로 느끼는 과일입니다"
담당자의 설명이 붙자 작품들은 표정을 갖기 시작했다. 감귤 나무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조형물은 바람을 담고 있었고, 빛에 따라 색이 바뀌는 감귤 껍질 작품은 계절의 시간을 품고 있었다. 말린 감귤 껍질과 꽃, 잎사귀가 작은 유리병에 담긴 공간은 '기억의 단면'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조형물이 아니라 '할망'들의 일생, 밭에서의 시간, 귤나무 아래에서 이어져 온 서귀포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기억의 바람' 공간에서는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11월이면 '할망'들이 새벽부터 밭으로 향하기 때문에 낮 동안 마을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 귤철에는 허리가 굽어도 손을 멈출 수 없다는 이야기, 귤로 자식들 대학 보냈다는 말을 왜 제주에서 흔히 듣게 되는지, 그 한 줄 한 줄에 삶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전시장을 나올 즈음, 귤 하나를 까먹던 도시의 나와, 감귤의 삶을 배우는 지금의 나 사이에 조용한 온도 차가 생겨 있었다. 전시는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마음을 건드렸다.
감각으로 배운 감귤의 세계

▲감귤 콜드 파스타 만들기 미각전 체험추첨으로만 참여할 수 있는 감귤미각전. 6세 아이도 따라하기 쉽고 맛도 모양도 으뜸이었던 체험 시간. ⓒ 이현숙
전시 뒤 이어진 체험은 아이들에게 또 한 번의 놀라움이었다. 추첨으로만 참여할 수 있는 감귤 미각전(감귤 콜드 파스타 만들기)에 6세 아이가 당첨되었다.
감귤, 황금향을 동그란 모양으로 자르자 향이 먼저 피어올랐다. 손끝을 이용하여 만든 감귤 즙, 재료들과 버무려지는 바사삭 소리, 노란 빛 올리브유와 감귤 즙이 섞일 때 나는 산뜻한 냄새까지. 아이의 눈과 손과 코가 동시에 움직였다. 파스타 한 입을 먹고 아이는 잠시 멈추더니 이렇게 말했다.
"달고, 새콤하고 시원해요. 귤 더 주세요."
새로운 맛을 자기만의 언어로 설명해보려는 아이의 얼굴은 조금은 설레는 듯했다. 그 순간 아이가 '맛의 세계'를 배우는 과정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있었다.
한편 둘째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감귤따기 체험장에 있었다. 두 분 모두 도시에서 오래 살아 귤 따기가 익숙한 편은 아니지만 적지 않게 귤 따기를 해본 나름 경력직이시다. 작고 잘 익은 귤을 찾는 어른들의 모습과는 달리, 어린 꼬마는 감귤을 따는 것보다 까서 먹는 데 더 바빴다. 갓 딴 귤의 신선함을 어린 감각으로 정확히 알아차린 것이다.
이제 집에 가서 먹자고 말릴 때까지 거의 '먹기 체험'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체험을 마치고 차에 타자마자 둘째가 말했다.
"엄마, 나무에서 따니까 더 맛있어요."
그 말 한 줄이 그날의 모든 감각을 정리해주었다. 아이들은 정말 먼저, 더 빠르게 '진짜'를 느낀다.
귤이 이어준 가족의 하루
체험과 전시를 모두 마치고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는 같은 감귤 향이 났다. 아이들은 요리와 갓 딴 귤의 신선함으로 귤을 배웠으며,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마음으로 귤을 다시 배웠다.
도시에 살 때 귤은 겨울이면 까먹는 달콤한 과일이었지만, 이제의 귤은 삶을 버텨낸 열매이자, 부모 세대의 시간을 지탱한 노동의 축이었다. 바람이 세게 불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감귤 나무처럼, 이 곳 제주 사람들의 삶 역시 바람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이어져 왔다.
육아와 함께하는 제주의 나날은 때로는 로망보다 현실이 앞서지만, 이런 하루는 그 현실의 결을 부드럽게 만든다. 전시장에서 맡았던 감귤 꽃 향처럼, 오늘의 기억이 오래 남을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들은 본 장면과 맛, 향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바랐다. 여기에서의 삶이 이렇게 작은 감각으로 채워져 오래 기억되기를.
그리고 문득, 앉은 자리에서 열 개 넘게 귤을 까먹는 아이를 보며 생각했다. 감귤로 할 수 있는 요리가 더 있지 않을까? 내가 아직 시도하지 않은 맛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감귤은 나에게 숨겨져 있던 요리 본능을 깨우는 작고 향긋한 촉매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