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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8 15:25최종 업데이트 25.11.28 15:25

세종대왕의 독서당제도

[붓의 향연 10] 세종임금처럼 많은 업적을 남긴 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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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역사문화관 내부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
세종대왕 역사문화관 내부"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 ⓒ 장순심

조선시대의 군왕 중에서 세종임금처럼 많은 업적을 남긴 이는 없다. 그래서 세종임금 앞뒤에는 성군(聖君) 또는 대왕(大王)이라는 존칭어가 붙는다. 세종의 선비사랑, 책사랑은 세계 어느 군주에 못지 않을 것이다. 세종은 집권하자마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했다. 현명한 학자들을 불러 모아 국정에 필요한 제도와 법, 정책 등의 조사와 연구를 위해 특별히 설치한 기관이다.

세종2년 (1420) 3월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신 중에서 나이 젊고 재질있는 사람을 뽑아서 배치했다. 집현전은 세종임금이 추진하는 국정일체의 자문기관으로, 제도와 연구기관의 역할도 했다.

집현전에는 고려의 수도 송도에서 거두어 온 책과 나라 안팎에서 수집한 많은 책으로 가득 채웠다. 수집된 책이 많아지면서 원래는 작은 전각이었던 집현전을 세종 11년에 대궐 서편에 새로 지었다. 장서각은 집현전 북쪽에 터를 잡아 좀더 화려하고 장엄한 모습으로 신축하여 위상을 높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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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안의 벽은 서가(書架)로 둘러싸고, 책을 분류하여 우선 책을 찾아내기에 편하게 하였다. 분류는 경(經)·자(子)·사(史)·집(集)으로 나누었다. 모르긴 해도 아마 세계 최초의 장서분류 체계가 아닐까 싶다. 세종의 선비사랑과 이들에게 글공부를 하도록 한 배려는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집현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아침 일찍이 들어와서 저녁 늦게 나가게 되었다. 시각(時刻)은 일관(日官)이 정하는 데 좇았었다. 때를 맞추어 부지런히 연구하게 하였으며, 일상 임금의 옆에서 공부하는 일이었다. 여기서는 아침 저녁 밥을 직접 궁중의 내관(內官)들이 대접하였고, 먹고 책을 보는 데 아쉽게 하지 않았다. 학사들은 밤에도 번을 들어 집현전을 지키고, 밤을 새고 글을 읽었다. 때로 새벽 첫닭 소리를 듣고야 자리에 눕기도 하였다. 세종은 그들이 쉴새없이 공부하는 것을 한없이 즐거워했다.

어느 때는 초피(貂皮)의 웃옷을 벗어서 새벽녘에 잠든 선비를 덮어주기도 하였다. 권채(權採)·신석견(辛石堅)·남수문(南秀文) 등은 그때 나이가 어리고 젊다 하여, 다른 벼슬을 하지 말고 집에서 편히 공부에만 전력을 다하게 하였다. 그때의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에게 직접 지도를 받도록 하였다. 또 산에 들어가서 절에서 공부하게도 하였다. 재주 있고 젊은 사람들이 나라의 사무에 바빠서 공부에 방해가 될 일을 피해 주었다. 이렇게 틈을 주어 연구에 몰두하게 하였다.

다른 데 마음을 쓰지 않고, 임금이 부탁한 일에만 전심(專心)을 하게 모든 비용은 나라에서 대어 주었다. 경사(經史)를 중심한 사상, 역사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문물제도, 더욱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 등 임금의 정치에 직접 소용되는 요긴한 과학을, 학사 전문가들이 걱정 없이 마음껏 공부하고 연구하게 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문장(文章)도 이 집현전에서 공부하던 사람들 중에서 나왔다. 유의손(柳義孫)·권채(權採)·신석조(辛碩租)·남수문(南秀文) 같은 사람들이 다 집현전에서 세종의 혜택을 받고 나온 학자들이다. 이중에서도 남수문을 제일로 꼽았다. (홍이섭, <세종대왕>)

세종과 같이 글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하는 임금이 있었기에 조선왕조 500년 문치의 기틀이 놓이게 되었다. 그런 바탕에서 한글이 창제되었고 수많은 도서가 간행되었다. <치평요람(治平要覽)>만 해도 그렇다. 세종 23년부터 27년까지 5년 여에 걸쳐 150권의 방대한 양으로 편술된 <치평요람>은 여러 나라의 흥망성쇠를 살펴 후손들이 두고 길이 거울삼아 참고하도록 했다. 이 책은 세종이 지중추부사 정인지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반드시 앞서의 치란(治亂) 즉 잘 다스리고 못 다스린 사적을 꼭 살펴서, 너무 번거롭거나 너무 간략하지 않도록 정리하라."고 지시하여 이루어졌다.

세종은 인문학적인 소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천문 기기(機器)와 명나라와 아라비아의 역법(曆法)과 천문도를 입수케 하여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4권을 발간했다. 그 시대에 아라비아의 역법까지 입수하여 책을 펴낸 것을 보면 세종은 시쳇말로 글로벌 군주라 하겠다. 세종은 재임 기간에 실로 많은 책을 편찬했다. 그것도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었다. 이색적이라면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편찬케 한 일이다. 이 책은 국가에 위급한 일이 있을 때 대처하는 군사지식을 정리하고 있다. 군대의 통솔, 전함의 제작, 수전(水戰)의 연습, 요새지의 선택, 성곽의 방비 등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또 <동국병감(東國兵鑑)>을 편찬케 하여 국방의 군사·전투이론을 개발시켰다. 세종은 결코 책을 좋아하고 선비들만 총애한 것이 아니라 천문·기상과 국방·과학문제 등 군왕으로써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춘 성군이었다.

이와 같은 여러 방면의 책을 간행하기 위해 활자를 새로 만들도록 했다. 금속활자를 20여 만 개를 주조하여 책을 많이 찍어 내도록 하고 국가기관이 민간에서 만든 백지(종이)를 대량으로 사들이게 하여 제지기술을 촉진시켰다. 활자 만드는 기술자를 우대하여 그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따로 매달 급료를 주었다. 이들이 천인 계층이었는데도 후하게 대접하여 자기 직분에 열심토록 했다. 책을 사랑하고 글 읽는 선비들만 아끼는 것이 아니라 책을 만들고 제작하는 직공들까지도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세종의 진정한 책사랑 정신의 '근본'을 찾게 된다.

세종은 1426년 12월 총명 준재한 젊은 문신을 선발하여 그들에게 책을 읽도록 틈(여가)을 주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만들었다. 동서고금에 임금이 유능한 문사들을 뽑아 전문적으로 책을 읽도록 집을 마련해 주고 후원한 사례는 별로 흔치 않는 일이다.

세종이 독서당 제도를 설립한 것은 유능한 인재를 길러 뒷날 크게 쓸 요량이었다. 인재를 배양하고 문풍(文風)을 진작하려는 왕의 깊은 뜻이 배어 있었다. 책을 읽고 싶어도 시간을 내기 어려운 젊은 신하들에게 풍광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하여 책을 읽도록 한 임금의 처사는 남다르다.

조선조에서는 차츰 이것이 전통으로 자리 잡아가면서 젊은 문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폭군이 등장하면서 한 때 철폐되기도 하고 흉년과 전란기에는 중단되기도 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선조 때의 임진왜란에 이르기까지 70여 년 동안 유지되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400여 년 동안 국가에서 문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서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조정에서 신하들에게 휴가를 주어 책을 읽도록 하는 이 사가독서제는 문종·단종 대까지는 잘 운영되다가 세조가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세종 24년에 제2차로 선발된 독서당출신 대부분이 뒷날 세조의 쿠데타를 반대한 사육신이었다.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신숙주·이석정 등 인데, 신숙주와 이석정을 제외하면 모두 사육신으로 단종복위에 가담했다가 참혹한 죽임을 당한 충신들이다.

세조는 자신을 반대하는 선비들이 대부분 독서당 출신이란 것을 알고 이를 마뜩치 않게 여겼다. 그래서 중단시켰다. 성종이 집권하면서 부활된 독서당은 연산군 10년에 다시 폐지되었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올곧은 선비들이 일망타진되고, 연산군의 황음이 날로 심해지면서 성균관은 환락의 장소가 되고 홍문관이 혁파되면서 독서당은 궁인들의 유희터가 되고 말았다.

중종반정과 더불어 독서당제도는 다시 회복되고 그동안 억눌리고 찌들렸던 문풍이 진흥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중종 5년 4월에 벌어진 삼포왜변으로 독서당은 문을 닫았다. 여기에 흉년과 재정난이 겹치면서 독서당은 존폐위기에 놓이게 되고, 조정 중신들은 거듭된 상소를 통해 폐지를 부추겼다. 능력있는 신진들의 진출을 달갑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성종 10년 대사헌 권민모(權敏毛) 등은 독서당에 뽑힌 학자들이 독서에 전념하지 못하는 이유를 들어, 홍문관에서 소환하거나 잡무를 맡기는 폐단을 없이할 것과, 독서당에 뽑힌 자들이 타성에 젖어 출입을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새로 '독서권려의 도를 강구할 것'을 상소했다.

실제로 여기에 뽑힌 사람들 중에는 시간을 준수하지 않고 출입을 멋대로 하는 등의 폐단이 따랐다. 권민모 등이 이를 지적하면서 독서당제도의 일대혁신을 주청한 것이다. 홍문관에서는 걸핏하면 독서당 문사들을 불러서 잡무를 시켰다.

독서당은 독서만을 하는 곳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주로 독서에 전념하는 일과(日課)와 월과(月課)가 짜여졌지만, 후기에 오면서 사서(史書), 자집(子集)의 강송(講誦)을 고시하는 등 여러 가지 역할이 주어졌다. 또 조정에서 과목을 내려서 그에 응수케 하거나 때로는 벗들 사이에 제목을 주고받아 시를 짓게 하는 방법으로 문학장려에도 힘썼다.

독서당 제도의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독서당원 중에는 기강이 해이해져 무인들과 활쏘기를 한다거나 일반인들과 어울려 술추렴을 하는 등 일탈된 모습을 보인 사람 들도 있었다. 또 권위와 우월감에 사로잡혀 월권행위를 일삼거나 매관매직에 개입하는 등 작폐가 나타났다 .그래서 독서당을 '독사당(毒蛇堂)'이라는 악의적인 세평도 나오게 되었다.

독서당원의 기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홍문관원 등이 1개월의 단기로 윤번으로 독서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성종 12년에 독서당이 정식으로 발족된 뒤로는 대개 6개월의 기한을 정하여 책읽기의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3개월 정도를 이수한 경우도 있어서 기한은 당시 상황에 따라 신축성이 있었던 듯하다.

덧붙이는 글 | [붓의 향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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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의 향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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