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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4일 오후 2시 46분]

정부가 '유해생물'로 지정한 야생동물의 권리와 생태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토론이 22일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열렸다. 환경 시민단체 생명다양성재단이 주최한 '제1회 유해생물 명예회복 포럼'에는 문화인류학자부터 생물학자, 사진작가까지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유해생물이라는 이름표를 떼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행 '유해야생동물 지정제도'는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에 따라 농·림·수산업 및 인간 생활에 피해를 준다고 판단된 동물을 '유해'로 규정하고 포획을 허용한다. 생명다양성재단에 따르면, 이 제도로 인해 2023년 기준 멧돼지 32만 마리, 고라니 22만 마리 등 연간 약 60만 마리의 야생동물이 사살되고 있다.

멧돼지의 농작물 피해, 고라니의 도로 침입, 비둘기의 배설물과 소음, 매미 울음소리에 대한 민원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날 포럼에 참석한 연사들은 유해동물 제도가 윤리적으로 문제일 뿐 아니라, 실제로 농민과 도시민의 불편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구체적인 연구와 사례로 보여줬다. 동물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환경과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주장이었다.

"유해성은 동물의 본질이 아니라 관계의 산물"

최명애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최명애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22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제1회 유해생물 명예회복 포럼'에서 한국의 생물 박멸 역사를 발표하고 있다.
최명애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최명애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22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제1회 유해생물 명예회복 포럼'에서 한국의 생물 박멸 역사를 발표하고 있다. ⓒ 임정우

최명애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가 특정 생물을 제거 대상으로 규정하고 조직적으로 박멸해 온 역사를 추적했다. 일제강점기 쥐잡기 사업부터 1950-1970년대 위생해충 대책, 1990년대 생태계교란종 박멸로 이어진 이러한 구조는 '특정 생물은 제거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게 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유해성은 종의 본질이 아니라 관계의 산물"이라며 "인간 중심의 판단으로 동물을 유해로 규정해 온 관행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두용 양두용(강릉원주대 생물학과)씨가 멧돼지의 생태적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양두용양두용(강릉원주대 생물학과)씨가 멧돼지의 생태적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 임정우

양두용(강릉원주대 생물학과 교수)씨는 멧돼지가 '생태 엔지니어'로서 숲에서 토양을 뒤집고 씨앗을 확산시키며 생물다양성을 유지하는 핵심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멧돼지 개체수가 급감한 지역에서 풀과 작은 식물들의 종류가 줄어들고 특정 종만 우세해졌다"며 "대량 사살 정책이 생태계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지적했다.

특히 양씨는 "농민들도 유해동물 제도의 수혜자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포획 허가를 받아야 하고, 포획 후에도 농작물 피해는 계속된다"며 "근본적인 해결책은 멧돼지를 죽이는 게 아니라 농경지 주변 환경을 관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선희 작가 문선희 작가가 고속도로에서 죽은 고라니를 촬영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죽은 고라니들의 초상을 기록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문선희 작가문선희 작가가 고속도로에서 죽은 고라니를 촬영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죽은 고라니들의 초상을 기록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 임정우

문선희 작가는 어느 날 고속도로에서 죽은 고라니를 보게 된 이야기로 발표를 시작했다. "차에 치여 죽은 고라니를 봤는데, 그 옆으로 차들이 쌩쌩 지나가더라"고 말한 그는 "그때 '이 동물의 얼굴을 제대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이후 죽은 고라니들의 초상을 촬영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도로에서, 울타리에 걸려서, 민원으로 포획돼서 죽은 고라니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고라니는 인간이 만든 도로, 울타리, 제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며 "우리가 만든 인프라와 시스템이 고라니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비둘기가 사람을 따르는 이유는 인간의 책임

조혜민 작가 조혜민 작가가 도시 비둘기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비둘기가 사람을 따르는 건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조혜민 작가조혜민 작가가 도시 비둘기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비둘기가 사람을 따르는 건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 임정우

조혜민 작가는 "비둘기가 자꾸 사람들에게 다가온다"는 민원이 많다는 점을 언급하며, 이것이 비둘기의 잘못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도시 비둘기는 원래 인간이 식용과 전서구용으로 사육하던 집비둘기의 후손이다. 즉, 인간과 함께 살도록 길들여진 동물이 도시에 버려진 것이다.

조 작가는 "사람을 따르는 건 비둘기의 본성이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다"며 "그런데 2009년 법제처 해석으로 비둘기를 유해야생동물로 규정하면서 먹이주기 금지 조례가 확산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비둘기장 설치 등 해외 도시의 공존 사례를 소개했다.

김태우 박사 김태우 국립생물자원관 박사가 곤충의 생태적 가치를 발표하고 있다.
김태우 박사김태우 국립생물자원관 박사가 곤충의 생태적 가치를 발표하고 있다. ⓒ 임정우

김태우 국립생물자원관 박사는 지구 생물종의 75%를 차지하는 곤충이 가장 혐오받는 생물군이라는 역설을 짚었다. 그는 '이로운 곤충과 해로운 곤충'이라는 인간 중심적 이분법을 비판하며 "곤충 다양성이 생태계의 기반"임을 강조했다.

장이권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는 매미·귀뚜라미·개구리의 울음소리가 민원 대상이 된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도시 열섬 현상으로 매미 밀도가 증가했다"며 "인간 중심적 소음 규제 기준이 자연의 소리마저 배제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장이권 교수 장이권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가 매미와 귀뚜라미 소리가 민원 대상이 된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장이권 교수장이권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가 매미와 귀뚜라미 소리가 민원 대상이 된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 임정우

김산하 대표 김산하 생명다양성재단 대표가 '야생 외교'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김산하 대표김산하 생명다양성재단 대표가 '야생 외교'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 임정우

김산하 생명다양성재단 대표는 "유해야생동물 제도는 본질적으로 살처분을 전제로 하며, 인간–야생동물 관계를 통제와 박멸 중심으로 구성해 왔다"고 비판했다.

그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야생 외교'를 제안했다. 이는 프랑스 인류학자 뱅상 데프레가 제시한 개념으로, 야생동물과의 관계를 일방적 통제가 아닌 상호 협상과 조정의 과정으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김 대표는 "동물을 제거 대상이 아니라 협상 대상으로 보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민규 생명다양성재단 연구원.
성민규 생명다양성재단 연구원. ⓒ 임정우

성민규 연구원은 포럼 중 생명다양성재단 사무실 앞 느티나무를 베어달라는 민원을 받은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이 나무에 둥지를 지은 까치 때 불편하다는 이유였다. 그는 "유해하다는 제도적 낙인이 사람들에게 우리가 동물과 맺고 있는 관계를 얼마나 나쁜 방향으로 파괴하는지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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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야생동물 지정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 대 동물' 구도를 만들어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제로섬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까치 둥지를 없애려다 느티나무를 베어버릴 뻔했던 것처럼, 동물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생태계 전체가 파괴되고 인간의 생활환경까지 악화될 수 있다. 연사들은 공통적으로 동물을 제거하는 대신 서식지를 보전하고 인간의 생활공간을 조정하면 양쪽 모두 이득이 되는 공생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행사장은 거의 만석을 이룰 정도로 많은 시민이 참석했다. 포럼 전후로는 '유해동물 외교단' SNS 릴레이 인증 이벤트가 진행되며 핵심 메시지가 온라인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편, 성민규 연구원은 "내년에도 이 주제로 포럼을 개최해 유해동물이라는 프레임을 조금씩 바꿔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단체사진 22일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열린 '제1회 유해생물 명예회복 포럼'에 참석한 연사들과 생명다양성재단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단체사진22일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열린 '제1회 유해생물 명예회복 포럼'에 참석한 연사들과 생명다양성재단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임정우





#유해동물#유해동물제도폐지#생명다양성재단#동물권#환경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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