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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3 14:08최종 업데이트 25.11.23 14:08

겨울을 데우는 맛, 주문진 도루묵의 계절

겨울 어시장의 풍경, 도루묵이 빚어낸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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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루묵, 겨울을 데우는 은빛의 생선

찬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 초입. 동해안의 새벽 바다는 아직 깜깜하지만, 어판장에는 긴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어둠을 뚫고 들어온 작은 어선 한 척. 그물이 끌려오자, 수면 위로 은빛의 물결이 일렁인다. 겨울을 알리는 첫 손님, 도루묵이다.

 도루묵을 잡기 위해 새벽 어둠을 헤치고 출항한 어선.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어민들의 분주한 손길이 겨울 바다의 생동감을 더한다.
도루묵을 잡기 위해 새벽 어둠을 헤치고 출항한 어선.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어민들의 분주한 손길이 겨울 바다의 생동감을 더한다. ⓒ 진재중

은빛 물결'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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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루묵의 제철은 11월과 12월. 알이 꽉 차고 살은 단단해지는 바로 지금이, 도루묵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명태나 오징어처럼 큰 자태를 드러내거나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 작고 담백한 생선만큼, 계절과 사람의 이야기를 품은 생선도 많지 않다.

어부들의 손끝에서 은빛 도루묵이 쏟아져 나오는 새벽. 이 순간이야말로 동해안 겨울의 시작이다.
주문진의 이모(72세) 어부는 "겨울의 항구에서 겨울의 시작은 도루묵이 알려줍니다. 이때부터 장작불을 지피고 그 위에 도루묵이 구워지는 것을 보면 바닷일이 풀립니다"라고 웃으며 말한다.

 겨울을 알리듯 도루묵이 잡혀 들어오는 주문진 항.
겨울을 알리듯 도루묵이 잡혀 들어오는 주문진 항. ⓒ 진재중

항구에 퍼지는 겨울의 향

주문진 어판장 한 쪽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화덕에 불이 올라 겨울 풍경을 채운다. 숯불 위 도루묵은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고, 차가운 공기 속으로 고소한 향이 퍼진다. 바삭하게 구워진 껍질과 노랗게 변한 알은 겨울 어시장의 정취를 더한다. 숯불에 구운 도루묵은 속살이 부드럽고 알이 탱글탱글해 씹을수록 풍미가 살아난다.

어판장에서 일하는 박종국(68세)씨는 "지글지글 구워지는 도루묵에 소주 한잔 곁들여야 비로소 겨울의 진객을 만난 기분이 든다"라며 웃었다.

식당에서는 무와 고춧가루를 넣어 얼큰하게 끓인 도루묵탕이 겨울 별미로 자리 잡았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물 한 그릇은 겨우내 굳어 있던 몸을 따뜻하게 데운다.

한편, 예전에는 아이들이 도루묵 알을 껌처럼 씹어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도루묵이 오랫동안 겨울 기억 속에 자리해왔음을 보여준다. 주문진에 사는 80세 김모 할아버지는 "배고프던 시절, 바닷가에 널어놓은 도루묵 알을 몰래 주워 주머니에 넣고 껌처럼 씹어 먹곤 했다"라며 옛 추억을 떠올렸다.

 알이 탱탱하게 영근 도루묵 알. 과거에는 이 알을 껌처럼 씹어 먹기도 했다.
알이 탱탱하게 영근 도루묵 알. 과거에는 이 알을 껌처럼 씹어 먹기도 했다. ⓒ 진재중

도루묵의 이름, 그 오래된 이야기

도루묵의 이름에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일화가 담겨 있다. 피난 중 우연히 '묵'이라는 생선을 맛본 선조는 영양 부족한 상황에서 그 맛에 감탄했고, 이후 이름을 '은어'로 고치도록 명했다. 전쟁이 끝난 뒤 궁중에서 다시 은어를 올리자 선조는 예전의 맛이 나지 않는다며 실망했고, "도로 묵이라 하라"라고 지시했다. 이 말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도루묵'으로 변했고, 결국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도루묵은 오래전부터 문학과 삶 속에 깊숙이 자리해온 겨울 생선이다. 시인 박목월은 한 구절에서 "장작불 위에서 익어가는 도루묵 냄새에 마음이 따뜻해졌다"라고 적으며, 도루묵이 주는 소박한 위로를 담아냈다. 소설가 조정래 역시 장편소설 <한강>에서 "도루묵 한 점에 밥 한 그릇이 사라지던 시절"을 언급하며, 가난하지만 다정했던 세월의 풍경을 기록했다.

도루묵은 더 이상 '말짱 도루묵'이라는 속담 속 비하적 표현으로만 소비될 생선이 아니다. 이 생선이 지닌 문화적·정서적 의미는 그보다 훨씬 크고 깊다. 누군가에게는 어린 시절의 소박한 맛으로 남아 있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가난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기억의 조각이다. 매서운 겨울, 허기진 배를 달래주던 작은 위로였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겉보기에는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그 안에는 사라져서는 안 될 삶의 흔적과 시대의 감정이 켜켜이 담겨 있다.

 주문진 수산시장에 겨울의 길목을 알리는 동해안 바닷가 생선, 도루묵이 가득 놓여 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계절 손님으로, 시장 풍경에 겨울의 분위기를 더한다.
주문진 수산시장에 겨울의 길목을 알리는 동해안 바닷가 생선, 도루묵이 가득 놓여 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계절 손님으로, 시장 풍경에 겨울의 분위기를 더한다. ⓒ 진재중

암수에 따라 갈리는 겨울 도루묵의 맛

도루묵은 암수에 따라 선호가 뚜렷하게 갈린다. 알을 좋아하는 이들은 뱃속에 꽉 찬 알을 품은 암컷 도루묵을 찾고, 담백한 맛을 즐기는 미식가들은 수컷 도루묵을 더 높이 평가한다. 겨울철 주문진 어판장에는 갓 잡아 올린 암수 도루묵이 나란히 놓여 있어 이러한 취향의 차이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상인들은 알이 가득한 암컷을 '여자 도루묵'이라 부르며 손님들의 발길을 끈다.

도루묵을 판매하는 김정숙(57세) 상인은 "요즘은 암컷과 수컷을 구분해 찾는 손님들이 많다"라며 암컷은 '여자 도루묵', 수컷은 '남자 도루묵'이라고 나눠 이름을 붙여놓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암수에 따라 맛의 차이가 뚜렷해 손님들도 이를 알고 구분해 달라고 한다고 덧붙였다.

 암컷 도루묵을 강조하기 위해 상인이 어판대에 ‘여자 도루묵’이라는 재치 있는 문구를 붙여놓았다. 알이 꽉 찬 암컷 도루묵을 찾는 손님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장치다.
암컷 도루묵을 강조하기 위해 상인이 어판대에 ‘여자 도루묵’이라는 재치 있는 문구를 붙여놓았다. 알이 꽉 찬 암컷 도루묵을 찾는 손님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장치다. ⓒ 진재중

겨울의 바다 위에 남은 은빛

한겨울의 해풍이 부는 주문진 항구. 그곳을 은빛으로 채우는 작은 생선 도루묵, 한때는 넘쳐나고 한때는 사라지는 듯 보이지만 겨울이 오면 다시 돌아오는 생선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이 작은 기적이 겨울 주문진 어시장을 오늘도 조용히 채워가고 있다.

주문진 어시장을 찾은 최현병(52) 씨는 "매년 겨울 도루묵 맛을 보기 위해 어김없이 이곳을 찾는다"라며 "도루묵이 명태처럼 추억 속에서만 남는 생선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주문진 수산시장 도루묵을 맛보기 위해 수산시장을 찾은 관광객
주문진 수산시장도루묵을 맛보기 위해 수산시장을 찾은 관광객 ⓒ 진재중



#도루묵#주문진#강릉#어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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