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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1 09:33최종 업데이트 25.11.21 09:33

물려받은 책에서 나온 필름 한장, 앗!

'마지막 황새'

앗! 황새 오래된 책 속에서 발견된 슬라이드 필름 한 장
앗! 황새오래된 책 속에서 발견된 슬라이드 필름 한 장 ⓒ 최한수

며칠 전, 오래된 책장을 정리하다가 물려받은 생태학 책 한 권을 꺼냈다. 책을 펼치자 스르르 미끄러져 나온 슬라이드 필름 한 장. 빛에 비춰 보이던 장면은 둥지를 지키는 황새였다. 앗! 황새. 숨을 들이켜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의 정체를 확인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국 조류학계의 거장, 고(故) 원병오 교수가 1982년 촬영한 사진이었다. 사진 속 황새는 "우리나라 마지막 황새"로 기록된 바로 그 개체. 아카시아꽃이 피어 있는 둥지를 지키는 암컷 황새였다. 1971년 밀렵꾼의 총탄에 쓰러진 수컷 없이, 10년 넘는 세월을 홀로 둥지를 지키며 버틴 생존의 상징이었다.

책 속에 숨어 있던 한 장의 필름은 절망과 희망이 교차했던 한국 생태사의 심장부로 나를 데려갔다.

마지막 황새 우리나라 마지막 황새. 수컷이 총에 맞아 죽은 후 홀로 둥지를 지키고 있다.
마지막 황새우리나라 마지막 황새. 수컷이 총에 맞아 죽은 후 홀로 둥지를 지키고 있다. ⓒ 원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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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충북 음성. 국내에서 사실상 사라진 줄 알았던 황새의 자연 번식이 마침내 확인되었다. 4월 1일 자 '동아일보' 1면에는 대문짝만한 기사로 이 소식이 실렸다. 마을은 순식간에 '황새 구경 명소'가 되었지만, 관심과 호기심은 보호로 이어지지 못했다.

희망은 너무 빨리 꺾였다. 신문 보도 후 단 사흘 만에 수컷 황새가 사냥꾼의 총에 맞아 쓰러졌고, 둥지 속 알도 도둑맞았다. '멸종위기종'이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대였지만, 이 사건은 한국 사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전문가들은 지금도 이렇게 평가한다.

"관심은 있었지만 책임은 없던 시대였다."

짝을 잃은 암컷은 무정란을 낳으며 혼자 둥지를 지켰다. 그조차도 오래 허락되지 않았다. 1983년, 농약이 묻은 미꾸라지를 먹고 중독되었다. 치료를 위해 동물원으로 옮겨졌지만, 자연으로 돌아갈 힘을 잃었다. 마지막 한국 황새는 짝이 죽어간 땅에서 23년을 버티다 결국 인간 사회의 무능과 무지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책 속 오래된 필름 한 장에 이토록 큰 슬픔이 숨어 있을 줄, 미처 몰랐다.

황새 새는 하늘을 날 때 가장 자연스럽다.
황새새는 하늘을 날 때 가장 자연스럽다. ⓒ 최한수

박제로 남은 황새… 한 자리에 모인 '증언들'

죽은 수컷은 경희대학교 자연사박물관에, 암컷은 서울대공원을 거쳐 국립생물자원관에 표본으로 보관됐다. 2018년 국립생물자원관의 '황새, 다시 둥지로' 특별전에서야 두 박제가 47년 만에 재회했다. 그러나 그 만남은 한 달 남짓이었다. 전시가 끝나자 두 황새는 다시 각자의 기관으로 돌아갔다. 유리 진열장 속 박제는 움직이지 않지만, 그 침묵은 우리가 놓친 질문을 또렷하게 던지고 있다.

'우리가 사라진 이유를, 너희는 기억하고 있는가?'

다행히 황새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황새복원연구센터는 1996년 독일과 러시아에서 황새 네 마리를 들여와 인공 및 자연 부화에 성공했다. 그 뒤 30년 가까운 복원 사업 끝에 2025년 현재 250여 마리의 황새가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연 번식도 확인되며 복원 사업은 성과를 내고 있다.

황새 현황표 우리나라에는 약 250마리의 황새가 있다. 모두 인공 복원 프로그램으로 태어난 개체이다.
황새 현황표우리나라에는 약 250마리의 황새가 있다. 모두 인공 복원 프로그램으로 태어난 개체이다. ⓒ 최한수
행사장에서 '귀빈 기다리다 폐사한 황새'

얼마 전 경남 김해의 행사용으로 동원된 황새가, '귀빈을 기다리기 위해' 땡볕 아래 좁은 새장에 1시간 30분 넘게 갇혀 있다 방사 직후 죽었다. 야생으로 돌아가야 할 생명을 '행사 장식물'로 취급한 인식, 책임 없이 보여 주기 식 행사만 챙긴 정치인의 태도가 만든 비극이었다. 과거의 황새가 인간의 무지 때문에 죽었다면, 지금의 황새는 '알면서도 되풀이하는 폭력'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방사 행사에 동원된 황새 방사 행사에 동원된 황새, 갇혀 있던 황새는 밖으로 나온 후 잠시 정신을 잃은 듯 주변을 살피다가 하늘로 날아간다.
방사 행사에 동원된 황새방사 행사에 동원된 황새, 갇혀 있던 황새는 밖으로 나온 후 잠시 정신을 잃은 듯 주변을 살피다가 하늘로 날아간다. ⓒ 최한수


오래된 필름을 다시 들여다본다. 둥지 위 황새의 눈동자가 빛을 받아 반짝인다. 활짝 핀 아카시아꽃 사이에서 황새는 마치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직접 말을 건네고 있었다.

"우리를 지켜줄 시간은 많지 않다."

작은 필름 한 장이지만, 그 안에는 반세기 동안 우리가 놓쳐온 생명의 경고와 사회적 책임이 오롯이 담겨 있다. 필름은 말이 없지만, 그 침묵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음 세대의 자연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연평도에서 관찰된 황새(K25) 2024년 K24와 태안에서 번식한 수컷
연평도에서 관찰된 황새(K25)2024년 K24와 태안에서 번식한 수컷 ⓒ 최한수

덧붙이는 글 | 생태학자 최한수 박사는 "복원의 숫자가 곧 생태 의식의 성숙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개체 수가 늘어도 ‘우리가 어떤 사회적 의식 위에서 이 생명과 공존하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라고 말한다. "지구야 변하지 마! 우리가 변할게."


#황새#멸종#복원#폐사#마지막황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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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수 (monera) 내방

자연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풀, 벌레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는 그날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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