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쯤 전에 일본에 출장을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와세다 대학과 릿쿄 대학 등 일본의 유수한 사립대학들의 평생교육과정을 탐방하고 관계자들과 인터뷰하는 목적이었습니다. 인구노령화가 우리보다 일찍 시작된 일본의 대학들은 일찍부터 성인 대상 평생교육과정들을 발전시켜왔습니다. 와세다 대학의 경우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대학 밖의 일반인들에 대한 교육을 주요한 과제로 여기며 강의록 출간 등을 시도해 왔고 1988년 매우 체계적인 성인 대상 교육과정인 익스텐션 센터를 설립해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모교로도 유명한 릿쿄대학의 경우는 2007년부터 릿쿄대학 세컨드 스테이지 컬리지(RSSC)를 설립했는데 쉽게 풀면 "두 번째 대학"에 해당합니다.
와세다 익스텐션 센터건, 릿쿄의 RSSC이건 한국 대학들의 일반적인 평생교육과정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짜여진 편이며 인생의 2막을 준비하는 50대 이상의 성인들에게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스스로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며 축적된 많은 경험을 토대로 다음 단계의 생을 새롭게 설계하는 과정들이었습니다.
특히 이번 출장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릿쿄대에서 인터뷰를 하는 중에 들은 인문교육, 교양교육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책임자인 히사시 오노 교수는 RSSC 과정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해주시는 과정에서 이것이 릿쿄의 건학 이념인 "리버럴 아츠(Liberal Arts) 중심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란 얘기를 거듭해서 했습니다.
리버럴 아츠는 라틴어 Artes liberales의 영어식 표현으로 몇 가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인문학이란 의미이기도 하지만 기초학문, 자유학문, 순수학문, 교양과목이란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여하간 실용 학문이 아닌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걸쳐 폭넓은 교양 중심의 교육을 시키는 대학 과정을 리버럴 아츠 컬리지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화 전공 과정 없는 릿쿄대서 어떻게 이런 인재가?

▲릿쿄 뉴웨이브는 1980년 이후 일본 영화에 매우 중요한 새바람이었음 ⓒ 영화의전당
히사시 교수에 따르면 릿쿄대학은 오래전부터 "교양 있는 전문가를 기르는 게 아니라 전문성 있는 교양인을 키우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해왔다"고 합니다. 얼핏 그게 무슨 차이인가 생각할 수 있지만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느껴집니다. 자기 분야에만 특화된 전문가가 아니라 삶과 세상 전반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있으면서 그 연장선에서 자기 전문성을 갖추는 것을 지향하겠다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릿쿄대학은 실용학문 쪽의 전공 과정이 다른 학교들에 비하여 확실히 적은 편이고 정치학부, 문학부, 사회학부 등이 유명하며 이문화(異文和) 커뮤니케이션학부 등 문화 관련 과정들도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릿쿄대학은 엉뚱해 보이는 것으로도 유명한 학교입니다. 1980, 1990년대에 일본 영화계를 주도한 중요한 영화감독들을 여럿 배출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이를 릿쿄 뉴웨이브라 불렀는데, 일본 영화계에서는 프랑스의 누벨바그에 비견되는 새로운 경향의 대두로 평가되었습니다.
릿쿄대의 영화 동아리 '세인트 폴 프로덕션(SPF)'과 '패러디어스 유니티(Parodius Unity)' 출신 감독들의 면면이 아주 화려합니다. <쉘 위 댄스>(1996)의 스오 마사유키, <큐어>(1997)의 구로사와 기요시, <유레카>(2000)의 아오야마 신지 등이 떠오르지만 이들 외에도 꽤 많습니다. 하지만 릿쿄대학에는 영화 관련 전공 과정이 없습니다.
릿쿄 뉴웨이브를 주도한 창조적 영화 인재들은 앞서 언급한 자생적 동아리들과, 일본을 대표하는 불문학자이자 영화평론가인 하스미 시게히코(전 도쿄대학 총장)가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전임교수가 되기 이전에 릿쿄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열었던 교양수업 '영화표현론'의 영향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누벨바그의 새로운 영화적 실험을 목격하고 돌아온 하스미 교수는 비록 교양수업이었지만 학생들에게 새로운 영화에 대한 지식과 경험, 영감을 던져주며 특히 새로운 영화 만들기를 독려했다고 합니다. 릿쿄 뉴웨이브의 주역으로 성장한 이들이 영화전공자가 아닌 사회학과(구로사와 기요시), 불문학과(스오 마사유키), 영문학과(아오야마 신지) 등에서 모인 학생들이었고 하스미 교수가 정작 본인은 영화를 직접 만들어본 적이 없는 순수이론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창의적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기술적 능력과 지식, 정보의 전수와 같은 단편적인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세상에 대한 통찰력과 소통능력, 자발성과 같이 훨씬 통합적인 교육을 통한 인간 성장의 촉진이 필요한 것은 어느 정도 분명해 보입니다.
아르코 지원 공공 인문학 교육 프로그램

▲<그림 > 파주 지역의 독립서점 시옷살롱책방에서 진행된 “길 위의 인문학” 프로공릉천에는 공룡이 산다 ⓒ 시옷책방
한편으론 이와 관련하여 올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에서 지원하고 있는 공공의 인문학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사업들을 현장평가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역시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2010년 즈음부터 시작된 이 인문학 교육 지원사업은 기본과정인 "길 위의 인문학"과 심화과정인 "지혜학교"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국의 공공 문화시설(도서관, 박물관 등)과 민간 문화시설(사립박물관, 독립서점 등)에서 직접 기획하여 심사를 통해 선정, 지원하는 사업입니다.
이번에 현장 전문가 평가에 참여하여 프로그램을 직접 경험하고 담당자, 강사 등과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프로그램의 수준이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70% 정도의 프로그램이 상당히 우수하게 느껴졌고 20% 정도는 다소 평이하지만 준수한 수준이었고 10% 정도가 다소 아쉬웠습니다. 아쉽게 느껴졌던 10%도 프로그램이 아주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 교육 지원 트랙에는 어울리지 않고 차라리 예술 요소가 결합된 사회복지 프로그램에서 지원하는 게 적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이렇게 좋은 인문학 프로그램이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는 것이 매우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몇몇 프로그램은 학기당 400만 원 정도의 수업료를 내야 참여할 수 있는 릿쿄의 RSSC나 와세다 익스텐션 센터의 강의 수준보다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참신한 프로그램도 존재했습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웠던 것이 있긴 합니다. 우선 가장 큰 것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수혜자(이하 참여자)가 대부분 매우 제한적이란 점입니다. 몇몇 특별한 경우를 빼면 대부분 중노년층의 여성들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상당수 프로그램이 평일, 일과시간에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경제 활동을 하는 이들은 원천적으로 참여하기가 무척 힘듭니다. 방문 평가를 했던 곳 중 드물게 다양한 세대와 성별을 볼 수 있었던 곳이 2, 3군데 정도 있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평일 저녁시간이나 주말에 열리는 프로그램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런 특정 대상들을 상대로 프로그램이 기획되다 보니 수준 자체는 우수하지만 프로그램의 다양성에 다소 한계가 보인다는 점이었습니다. 청년층에게 매력을 줄 만한 프로그램이 확실히 부족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한 프로그램이 2개 정도 떠오릅니다.
시민들에게 쉽지 않겠다, 했는데... 반전이
하나는 경기도 모 신도시의 공공도서관에서 평일, 저녁에 열렸던 미술사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사실 이 지원 사업 중에 미술 등 예술사 관련 수업이 은근히 많아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 프로그램은 달랐습니다. 단편적으로 미술의 역사를 교양 수준에서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술의 역사를 세계의 사회적 변화와 연관시키며 현재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꽤 심층적인 접근과 해석을 참여자들에게 요구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프로그램 내용을 미리 훑어보면서 "이거 일반 시민들에게 쉽지 않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다양한 세대가 모여서 강의를 경청했고 자발적 발표와 토론을 진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2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대가 모였는데 고갱의 타히티 시절 회화를 중심으로 토론을 하면서 그 역사적 맥락과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신도시가 갖고 있는 이주와 그에 따른 문화적 변동 문제에 대하여 상당히 심도 있는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토론 수준이 너무 높아서 웬만한 대학원 강의에 버금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 한 가지 사례는 역시 경기도 모 도농복합도시의 독립서점에서 이뤄진 주말 프로그램인데 독특하게도 해당 지역의 환경 문제와 마을 영화만들기가 결합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지역은 최근 급격하게 도시화와 개발이 이뤄지고 있는 곳으로 특히 하천을 중심으로 한 난개발에 대한 논란이 큰 지역입니다.
해당 독립서점의 프로그램은 지역개발과 환경보전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교육과 토론으로 전반부가 구성되어 있고 그걸 토대로 자발적으로 모인 참여자가 지역문제를 단편 영화 시나리오로 함께 만들어가는 스토리텔링 과정이 중반부에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함께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인근에 거주하는 전문 영화감독의 코칭을 받아 스마트폰을 이용해 영화 제작까지 진행하는 것이었습니다.
환경문제와 스토리텔링, 영화에 대한 이해가 융합되어있는 상당히 도전적인 기획이었는데 무엇보다도 7세에서 84세까지 이르는 정말 다양한 참여자들의 자발성과 열의에 매우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제작한 단편영화는 최근 지역의 공공도서관에서 작은 상영회까지 끝마쳤습니다.
내란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전임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모 대학을 방문해 "인문학을 왜 4년씩 공부하냐"라는 식의 '인문학 무용론'을 내놓았다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적이 있습니다. 그의 발언을 다시 돌아보면 교육에 대하여 기능 습득 위주의 관점을 갖고 있는 것이 확인됩니다. '당장 쓸모가 없는 것을 왜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공부하냐'라는 식의 관점인데 정작 사회를 성장시키는 창의성의 원천들은 그런 당장에는 쓸모없어 보이는 공부를 통해 길러지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통합적인 사고능력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에서 이미 십수 년 이상 시행되어 온 사회 인문학교육 프로그램들을 더욱 성장시키며 대중적으로 확산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정부에서도 이런 프로그램에 대한 양적 확대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질적 확대를 병행하기 위한 장치들을 연구하고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앞서 언급했듯 청년 세대 등 다양한 세대들을 이런 프로그램에 자발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보편적으로 많이 이뤄지고 있는 강의 형태의 프로그램 외에도 다양한 실험이 포함된 인문 활동에 대한 지원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설계 과정에 우수한 인문학 인력들뿐만 아니라 프로그램의 당사자들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청년 세대들을 포함한 다양한 시민들이 직접 기획하고 참여하는 인문 프로그램이 활성화되는 것은 무형의 미래 자산을 쌓아가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굿모닝 충청에도 실립니다. 글쓴이는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