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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9 15:54최종 업데이트 25.11.19 15:54

'붓의 향연'을 찾아 떠나면서

[붓의 향연 1] 글 머리에 : 오랜 세월 붓은 우리의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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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글씨 자료사진
붓글씨자료사진 ⓒ 김영조

우리는 붓(文)의 나라다. 칼로 나라를 세우고도 곧 붓의 지배구조가 되었다. 고려를 세운 왕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다르지 않았다.

붓은 곧 문(文)을 상징한다. 여기서 붓은 문·사·철·시·서·화를 포괄한다.

"날카롭고 가지런하고 굳세고 둥근 것은 붓의 네 가지 큰 덕이다."(추사 김정희, <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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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산업화 시대에 '붓 타령'은 해외 관광여행을 떠나면서 도시락을 챙기는 격이 될 지 모르지만, 사자성어 중에 끝까지 간직해야 할 '온고지신'의 정신이야말로 변혁과 불확실성이 겹치는 시대의 기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긴 역사 동안 붓의 시대를 살아왔다. 고려의 무인시대, 조선의 연산군 등 폭군시대, 원나라와 청국의 간섭시대, 일제강점기,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군벌과 이를 빼닮은 윤석열의 폭정을 겪으면서도 끝내 이를 물리치고 붓의 시대를 지켰다.

돌이켜보면 칼이 지배하던 시대가 아니어도 붓이 칼춤을 추는 일은 끊이지 않았다. 지금도 윤석열의 12.3 불법계엄과 내란에 동조하며 '계몽'되었다는 무리가 도처에서 활보하고 적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이런 의미에서 칼춤을 추는 붓의 폐해가 심하고 그 구린내는 오래 간다.

우리 선대들은 악독한 인간들의 전횡에도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위대한 붓의 유산이다. 연암 박지원은 호랑이의 입을 빌려 악독한 인간들을 질타한다.

대개 제것이 아닌 것을 취함을 도(盜)라 하고, 남을 못살게 굴고 그 생명을 빼앗는 것을 적(賊)이라 하니, 너희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쏘다니며 팔을 걷어부치며 눈을 부릅뜨고, 함부로 남의 것을 착취하고 훔쳐도 부끄러운 줄 모르며, 심지어 돈을 형이라 부르고, 장수되기 위해 아내까지 죽이는 일까지도 있은 즉, 이러고도 인륜의 도리를 논할 수 있을 것인가.

흔히 '붓'이라면 '양반문화'를 연상하게 된다. 그런 측면이 없는 바 아니지만 조선 중기 이후에는 중인·서얼 심지어 기녀들까지도 붓을 들고 창(昌)을 읊었다. 계층에 상관없이 붓은 사람들의 반려였다.

정인(情人)이 떠나면 이별의 시를 서로 주고받고, 놀이를 나가면 그 흥취를 읊는다. 좋은 산천경개를 구경하면 기행시를 쓰고, 사람이 죽어도 만시(挽詩)를 쓴다. 뿐만이 아니다. 가난에 찌들면 가난을 읊고 신세가 어려우면 한탄을 노래한다.

그러기에 이들 시 속에 사경(寫景)도 있고 찬탄도 있고 원망도 있고, 때로는 비유도 있고 풍자도 있고 정념(情念)도 있다. 게다가 자기의 사담을 담기도 하고 시대의 모순에 도전하는 사회시(社會詩)를 쓰기도 한다. 그러니 옛 선비들에게 있어 시는 밥 먹고 자는 일 만큼이나 일상적이었다. (이이화, <우리 겨레의 전통생활>)

오랜 세월 붓은 우리의 일상이었다. 추사가 말한 '붓의 네 가지 덕'은 우리 민족문화의 발원이고 전통이다.

옛날 사람들은 붓으로 글씨를 썼습니다. 그 보드라운 모필 끝에서 묵향(墨香)과 함께 하나의 태어나는 글씨들은 작은 풀잎, 작은 꽃잎과도 같습니다. 잘 쓴 글씨든 못 쓴 글씨든 붓으로 씌여진 글씨에서는 생명의 흐름을 읽을 수가 있지요.

그것은 글씨를 쓰고 있는 사람의 지문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붓은 끝이 부드럽기 때문에 쓰는 사람의 영혼을, 의지를, 그리고 그 생명적인 것들을 글씨의 한 획마다 옮겨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일자 하나라도 그것은 그냥 가로 그은 선이 아니라 붓을 대고 끌고 뗀 삼박자의 숨결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힘의 강약과 속도의 늦고 빠름을 섬세하게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붓으로 제일 쓰기 힘든 것은 자로 대고 그은 것 같은 직선일 것입니다.
- 이어령, <떠도는 자의 우편번호>

'붓의 향연'이라 이름 짓고, 붓이 남긴 문·사·철·시·서·화의 값진 알곡을 찾아봄으로써 변혁과 예측불가의 AI시대에 삶의 지침에 작은 도움을 주었으면 싶다.

덧붙이는 글 | [붓의 향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붓의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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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붓의 향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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