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5.11.18 11:35최종 업데이트 25.11.18 11:35

김선택, 험난한 세상에 궂은일 도맡은 살림꾼

<민청련두꺼비열전> 맑은 영혼, 김선택 (1)

  • 본문듣기
1991년은 '죽음의 해'였다. 4월 26일 명지대학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전투경찰에게 구타 당해 숨진 것을 시작으로 5월 한 달 동안 무려 8명의 학생과 노동자가 제 몸을 불살라 민주 제단에 바쳤다. 전두환을 계승한 노태우 정권에 대한 처절한 투쟁이었다.

4월 29일 전남대생 박승희, 5월 1일 안동대생 김영균, 5월 3일 경원대생 천세용. 하루가 멀다 하고 분신 항거가 이어지고 5월 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의 분신이 이어졌다.

노태우 정권은 이 사태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이들의 잇단 분신은 누군가의 계획에 의해 벌어졌을 것이라는 흑색선전을 해대더니 끝내 김기설에게서 그 증거가 드러났다고 했다. 김기설이 남긴 유서가 그의 필적이 아니라 누군가가 대신 써준 것이라는 해괴한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 대필자로는 김기설의 선배 강기훈이 지목되었다.

 김기설 분신 항거를 유서대필 사건으로 보도한 1991년 5월 24일 조선일보 보도 갈무리
김기설 분신 항거를 유서대필 사건으로 보도한 1991년 5월 24일 조선일보 보도 갈무리 ⓒ 조선일보

분신한 김기설 유서에 등장한 김선택

AD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김기설이 존경하던 선배였던 김선택이 김기설의 유서에 이름이 오르면서 시작되었다.

1991년 5월 7일 김기설이 분신자살하기 전날 저녁, 김선택은 여의도 형님 댁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가 있어서 옷이라도 갈아입으려고 오랫만에 집에 들어왔다. 선택은 전민련 사무처장 대행으로 연세대에서 강경대 사건 범국민대책회의 뒤치닥거리를 하느라 근 열흘째 집을 비우고 있던 차였다.

집에 들어서자 전민련 실무자로 있는 후배 임무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기설이가 이상해요." 전민련 사회부장으로 있는 김기설이 여자 친구에게 분신하겠다는 얘기를 해서 지금 임근재, 이도레가 대학로에서 기설이를 붙들고 만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선택이 놀라 "그럼 내가 나갈까?" 물었더니 임무영이 지금은 대체로 상황이 정리된 것 같으니 안 나와도 될 것 같다고 했다. 선택은 안심을 하고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집을 나오는데 덩치가 우람한 형사 세 명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함께 가자고 했다. 그래서 웬일이냐고 물으니 김기설이 분신했다는 것이었다. 김선택은 자신이 피의자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기 전에 우선 연세대로 갑시다"라고 버텼다.

연세대 강경대 대책위 상황실에 가서 사태를 파악해 보니 김기설이 서강대에서 분신·투신해서 온통 난리가 나 있었다. 김기설의 유서에 김선택의 이름이 나오고 그래서 경찰들이 자기를 찾았다는 것도 알았다. 함께 온 경찰들에게는 나중에 필요하면 참고인 조사에 응하겠다고 얘기하고 돌려보냈다. 그리고 오후에 시간을 내 서강대에 가서 기설이 투신했다는 자리를 살펴보았다. 아직도 선홍색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김기설은 노태우 정권 퇴진과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제 몸을 던졌다. 김선택은 우선 기설의 장례를 잘 치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범국민대책위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쪽으로 추진했는데, 공론이 모아지지 않았다. 선택은 차선책으로 인재근, 장준영, 최규성 등 민청련 선배들과 의논하여 전민련장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평민련(재야 출신 민주당 입당자 단체)의 도움을 받아 차와 엠프를 지원 받고, 850만 원 모금도 해서 기설의 장례를 무사히 치렀다. 5월 12일 기설의 유해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민청련 활동을 하던 당시의 김선택
민청련 활동을 하던 당시의 김선택 ⓒ 민청련동지회

강기훈 유서대필사건과 명동성당 농성

그러나 기설의 장례 직후부터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김기설의 분신 직후 그날 오전 10시경 청와대에서는 대통령 비서실장 주재로 검찰총장 정구영, 법무부장관 김기춘 등 치안관계 대책회의가 열렸고, 회의 직후 검찰총장 정구영은 산하 검찰에 분신자살 배후를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이 지시를 받아 서울지검장 전재기는 사건을 강력부에 배치 강신욱 부장검사를 반장으로 한 다섯 명의 검사로 전담조사반을 구성했다. 김기설이 분신한 날 박홍 서강대 총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분신의 배후에 '죽음을 선동 이용하는 반생명적 세력'이 있다고 발표했다.

게다가 김기설의 분신이 있기 사흘 전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우라'는 제목의 민주화운동권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이런 김지하와 박홍의 발언은 검찰의 조사 착수를 응원하는 역할을 했다.

검찰은 즉시 수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강기훈을 유서대필자로 지목하고 체포에 나섰다. 5월 18일부터 범국민대책회의는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했고, 김선택도 여기에 합류했다. 검찰은 5월 26일자로 강기훈을 자살방조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발부 받아 공식적인 체포작전에 나섰다.

명동성당 농성은 한달 이상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동안 유서문제를 둘러싸고 공안당국과 재야 민주화운동 진영의 공방은 끝없이 이어졌다. 김선택은 명동성당 문화관 농성장에서 살림살이를 도맡았다. 가장 큰 일이 50명이 넘는 식구들 식사 조달하는 일이었는데, 범국민대책위 식구들 이외에도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는 다른 단체들과 노숙자들까지 가세해서 실제 식사하는 사람은 100명이 넘었다. 이들이 삼시 세 때를 놓치지 않도록 선택은 '밥풀데기'가 되어 열심히 일했다.

도망자가 되다

수사기관에서는 6월 5일 김선택 등 명동성당 농성 주동자들에 대해서 일제히 수배령을 내렸다. 수배령이 떨어진 지 며칠 후 장준영(성균관대 73), 문국주(서울대 73) 선배가 선택을 찾아왔다.

"야, 너 도망가야겠다. 너 찾는다고 난리다. 너 찾으려고 해서 여기가 유지를 못하겠으니 너 먼저 도망가라."

선택은 선배들의 말에 따라 농성장을 빠져나가기로 마음을 먹고, 문국주가 주선한 한 신부의 승용차 트렁크에 실려 농성장을 빠져나왔다. 신부는 선택을 만리동성당에 내려주었다. 선택은 신부의 얼굴도 보지 않고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성당을 나왔다. 만일 수사기관에 잡히더라도 누가 자신을 태워줬는지 불지 않으려는 선택 나름의 배려였다.

명동성당을 빠져나온 선택은 그 후로 1993년 7월에 잡힐 때까지 2년 2개월을 수배자로 도망다녔다. 선택에게는 500만 원 상금과 1계급 특진이 걸려 있었다. 여러 번 잡힐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용케 잘 숨어 다녔다. 선택의 집 관할서인 종암경찰서에는 김선택 체포 전담반이 만들어져 아내 권미혁이 혼자 살고 있는 미아리 아파트 뿐만 아니라 선택이 갈만한 친척 친지들의 집에 대해서도 철저히 감시를 했다. 권미혁이 등산하는 산에까지 쫓아와 먼 발치에서 감시할 정도였다. 선택은 아내 미혁을 만나고 싶을 때는 주로 교차환승역을 이용했다. 발각되더라도 쉽게 도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를테면 3호선과 4호선이 교차하는 충무로역이 그 중의 하나였다.

 금슬이 좋기로 유명했던 김선택 권미혁 부부
금슬이 좋기로 유명했던 김선택 권미혁 부부 ⓒ 민청련동지회

1993년 7월 어느날 선택은 후배 집에서 자고 나오다가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앞에서 서초경찰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체포되었다. 오랜 수배생활에 지쳐 있던 선택은 차라리 잘 되었다는 심정이었다. 선택은 서초서를 거쳐 종암경찰서로 넘겨져 조사를 받았다. 이미 강기훈 재판도 끝난지 오래라 유서대필사건은 완전히 빠져 있고, 그 이전 국민대회 등 폭력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서울구치소로 넘겨졌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특별히 죄가 될 일이 있을리 없었다. 한 달쯤 후에 공소취하로 검찰 손에서 풀려나왔다.

강기훈의 무죄를 밝히다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유서대필사건은 어느덧 세상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강기훈이 억울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전민련 인권위원장으로 이 사건의 여파로 감옥살이를 했던 서준식과 사무처장 대행으로 수배되었던 김선택이 앞장서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강기훈공대위)를 꾸리고 다양한 구명활동을 펼쳤다.

김선택은 유서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자료집 발간에 집중했다. 이렇게 해서 1년여의 자료수집 끝에 나온 것이 1993년 7월에 발간된 무려 2,700쪽에 이르는 <유서사건 총 자료집>이었다.

세상이 바뀌어 2005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직속으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를 발족시켰다. 이 진화위에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1순위로 다루기 시작했다. 안경호, 홍수정 등 진화위 조사관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새로운 필적감정이 이루어졌고, 진화위는 조사 19개월 만인 2007년 11월 13일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조사를 종료하면서 국가로 하여금 강기훈과 그의 가족들에게 사과하고 재심재판으로 누명을 벗겨줄 것을 권고했다.

강기훈은 진화위의 권고를 근거로 2008년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재판부는 여러 증거들을 종합하여 강기훈의 무죄추정을 내용으로 한 판결을 내렸다. 사건 발생 17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검찰이 상고하여 이 재심 사건은 대법원에 올라가 최종판결을 기다리게 되었다. 대법원은 재심을 차일피일 미루며 시일만 허송했다.

그러던 중 2012년 4월 강기훈에게 간암이 발견되었고, 5월에 간 절반을 잘라내는 대수술을 했다. 강기훈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 알려 지면서 김선택은 전민련 선후배들과 긴급히 강기훈의 건강과 재심 개시 촉구를 위한 모임을 조직했다.

마침내 그리하여 2012년 8월 향린교회에서 함세웅, 이창복, 김상근 등 재야인사 200여 명이 모여 '강기훈의 쾌유와 재심개시 촉구를 위한 모임'을 결성했다. 이 모임에서는 각계 인사들의 서명을 받아 정계와 법조계에 탄원서를 제출하여 조속한 재심 개시를 촉구하면서 강기훈의 치료를 위한 모금활동도 진행했다.

10월 9일 서울 시립대에서 가수 이은미, 안치환 등이 출연하는 강기훈 치료비 마련을 위한 모금공연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을 열었다. 공연 후 가수 이은미가 자신의 출연료를 전액 치료비로 내놓아서 감동을 주었다. 10월 19일에 드디어 대법원에서 검찰의 재항고를 기각하고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고법에서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린지 3년여 만의 일이었다.

 ‘강기훈의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 집행위원장으로서 김선택이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을 방문해 대법원의 무죄 판결에 불복한 검찰의 상고에 항의하는 서한을 접수했다.
‘강기훈의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 집행위원장으로서 김선택이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을 방문해 대법원의 무죄 판결에 불복한 검찰의 상고에 항의하는 서한을 접수했다. ⓒ 민청련동지회

2014년 2월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형사 10부에서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재심재판 선고공판이 열렸다. 재판장 권기훈(배석판사 이주형, 김형석)은 강기훈에게 유서대필 부분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했다. 30분에 걸친 재판장의 판결문 낭독이 끝나자 법정을 가득 메웠던 방청객들 속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같이 일하던 동료 후배의 유서를 대신 써줬다는 어처구니 없는 죄명으로 구속되었던 강기훈은 사건이 있었던 1991년부터 무려 23년 만에 비로소 억울한 누명을 벗은 것이다.

김선택은 이 감격스러운 재판정을 나오면서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자신의 온 생애를 걸고 민주화운동 후배의 결백을 밝히려 매진해 왔고, 이제 그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리고 선택은 이제 남은 일은 유서대필사건을 조작한 자들과 조작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고 거기에 자신의 모든 힘을 다 쏟기로 다짐했다.

#김선택#민청련
댓글
연재

민청련두꺼비열전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