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5.11.15 19:50최종 업데이트 25.11.15 19:50

[추모글] 신군부 녹화사업 희생자, 한희철 형에게

한희철 열사를 추모하며

  • 본문듣기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한희철 추모비
한희철 추모비 ⓒ 모란공원사람들(moran.or.kr)

형,
형이 끔찍이도 아껴주던 철도고 1년 후배 김슬옹이에요. 42년이 흘렀습니다. 1983년 12월 11일 새벽, 형이 우리 곁을 떠났으니 말입니다. 그때 형은 스물여섯, 가장 빛나야 할 청춘이었습니다.

1979년 4월 그날이 아직도 선합니다. 꽃샘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철도고등학교 낡은 교실에서, 작달막한 체구의 형이 우리 앞에 섰습니다. 6.25 참전 용사로 두 다리를 못 쓰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하루 두세 시간만 자면서 공부해서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합격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지요.

사실 실업계 특목고 철도고등학교에서 실업계 동계 진학이 아닌 일반 진학으로 서울대에 합격한 것은 누가 봐도 기적이었습니다. 우리반 50명은 기적을 일군 선배님 말씀에 모두 귀를 쫑긋했지요. 형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에게는 빛이었습니다. 가난과 불우함 속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형의 격려가 제가 연세대에 진학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습니다. 특히 외솔 최현배 선생님의 뜻을 잇겠다던 저를 형은 각별히 응원해 주셨습니다. "너는 반드시 해낼 수 있어." 그 말이 제 평생의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AD
그런데 형, 1982년 제가 짧은 철도공무원 생활을 거쳐 간신히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간 뒤 형의 소식이 끊겼고, 1983년 겨울 그 충격적인 비보를 나중에서야 들었을 때 저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군사정권의 '녹화사업'이라는 것에 희생되었다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형이 1983년 12월 8일, 보안사로 끌려가 80센티미터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맞았다는 것을. 영문도 모른 채 고문을 당하고, 동료들을 밀고하라는 강요를 받았다는 것을. 그러나 형은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확인하면 다 나타날 부분'만 진술하겠다며 동료들을 지켰습니다.
12월 10일 밤, 형은 마지막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11일 새벽, 스스로 경계근무를 자원한 뒤, 유서를 남기고 총을 들었습니다. 프락치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형, 형이 그토록 애써 이룬 서울대 합격도, 그 빛나는 미래도 모두 내려놓고 지키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동료들이었고, 양심이었고, 인간의 존엄이었습니다. 형은 자신을 배신하느니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군사정권은 형의 죽음을 은폐했습니다. 형이 보안사에서 조사받은 사실조차 감추려 했습니다. 그러나 형이 남긴 편지와 유서가 진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형,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형이 1979년 그 교실에서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단순히 공부 잘하는 비법이 아니었다는 것을. 형은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삶, 정직하게 사는 삶, 동료를 배신하지 않는 삶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지난 48년간 한글 운동과 우리말글 연구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때로 힘들 때마다 형의 그 따뜻한 격려가 떠올랐습니다. 형이 보여준 그 삶이 제게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형, 이제는 형을 제대로 기억하고 추모해야 할 때입니다. 신군부 녹화사업의 희생자, 양심을 지킨 청년, 동료를 배신하지 않은 선배, 스물여섯의 나이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한희철 열사. 형의 이름을 역사에 제대로 새겨야 합니다.

형이 그토록 아끼던 후배로서, 이제 60대 중반이 된 제가 형을 기억하고 증언합니다. 형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형이 지키고자 한 가치들이 이 땅에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끝까지 힘쓰겠습니다.

형, 부디 편히 쉬소서.

2025년 11월, 철도고등학교 1년 후배(구내과 11기) 김슬옹 올림

한희철 열사 철도고 3학년 재학 무렵(1978) 철도고 조회 모습( 학교 제공 자료사진)
한희철 열사 철도고 3학년 재학 무렵(1978) 철도고 조회 모습(학교 제공 자료사진) ⓒ 김우태(작고)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희철 기념사업회가 추모 문집에 들어갈 글이다. 추모 문집은 2025년 12월에 발간될 예정이다.


#한희철열사#철도고#녹화사업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훈민정음학과 세종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1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