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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20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2025 신한 SOL 뱅크 KBO리그 롯데 자이언츠와 LG 트윈스의 경기. 3-5로 패배한 롯데 선수들이 더그아웃으로 향하고 있다. 롯데는 이날 패배로 2003년 7월 이후 22년 만에 10연패를 기록했다.
지난 8월 20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2025 신한 SOL 뱅크 KBO리그 롯데 자이언츠와 LG 트윈스의 경기. 3-5로 패배한 롯데 선수들이 더그아웃으로 향하고 있다. 롯데는 이날 패배로 2003년 7월 이후 22년 만에 10연패를 기록했다. ⓒ 연합뉴스

바야흐로 야구 비시즌이다. 다른 해에는 이 시기에 야구 만화나 영화 등의 야구 콘텐츠나 응원팀의 유튜브 영상을 아껴보며 시즌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올해는 조금 다르다.

나는 롯데자이언츠에게 단단히 삐졌다. 역대급 폭망의 해였다. 8월 초까지 3위였다. 8월 초까지 가을 야구에 갈 확률은 무려 94.9%. 그 무렵 남편과 나는 가을 야구 티케팅을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8월 6일 이후, 12연패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매여름마다 열일하는 '오늘은 다르겠지'라는 내 뇌 속의 희망 회로는 올여름에도 끊임없이 돌아갔고, 결국 과부하로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94. 9%의 확률은 0.3%까지 떨어졌고 가을 야구 진출은 무산되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뀐 건 한두 해가 아니지만, 6, 7위에서 가을 야구가 좌절되는 것과 3위에서 7위로 추락하며 가을 야구를 못 가는 건 달랐다. 마음이 급격히 식었다.

며칠 전, 아이는 학원에 가고, 남편은 야근이었던 저녁이었다. 혼자 식탁 앞에 앉았는데 집안을 꽉 채운 고요함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저녁마다 집을 울리던 야구 중계도, 나의 환호도, 아쉬움의 탄성도 없다. 갑자기 난 식탁 위 노트에 '야구'라는 글자를 썼다. 새삼 '야구'라는 글자가 예뻐 보였다. '야구'라고 입을 벌려 발음해 봤다. 내지르는 듯한 첫 발음 '야'도, 입이 앞으로 쭉 나오는 다음 발음 '구'도 모두 야구와 어울린다. 공을 던지는 느낌, 던진 공이 앞으로 쭉 나아가는 느낌이 난다. 그러고는 드는 생각. '그런데 우리 팀은 왜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나.'

야구로 연애하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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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 야구를 보기 시작한 건 소통을 위해서였다. 소개팅한 남자가 야구를 좋아한다기에, "저도 야구 좋아해요!" 하는 말을 뱉어버렸다. 야구 규칙을 공부하고 롯데 선수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그러고는 롯데 팬이라는 그 남자와 야구장을 갔다. 야구에 대해 말하면 대화가 길게 이어졌다. 야구는 그 남자와 대화하기 위한 소통의 도구였다.

그러길 몇 년, 그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 아이와 간 야구장에서 아이가 야구에 흥미를 보였다.

"엄마, 야구 재밌다!"

그 뒤로 야구는 사춘기 아이와 나 사이의 소통의 도구가 되었다. 야구선수 중 누가 자신의 스타일인지 외모 이상형을 하기도 하고,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며 서로의 생각을 말하기도 했다.열심히 연습하는 선수들이 나오는 영상을 보고는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선 저렇게 최선을 다해야 해'하는 얘기를 하기도 하고, 부진을 극복하고 홈런을 치는 선수를 보며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때가 와'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다 야구 안에 있었다.

그 말들을 아이에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 말들은 내 안으로 들어왔다. 야구선수를 보며 더 노력하려고 다짐하고, 준비되어 있으면 기회가 올 것을 믿게 됐다. 이제 아이는 예전처럼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야구는 소통의 도구에서 성찰의 도구가 되었다.

야구는 나에게 인생을 알려주는 교보재이므로, 나는 롯데의 플레이를 보며 심하게 흥분하지는 않았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우리 팀의 야구를 보며, '그래, 저런 게 인생이지'하고 생각했다. 잘하는 팀의 팬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지만, 롯데 팬인 남편과 나는 "그렇게 이기기만 하면 무슨 재미야"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 가을엔 수습 불가능한 감정 상태가 됐다. 몇몇 기사와 유튜브에서 이번 순위 폭락을 '롯데가 롯데했다'라며 비아냥댔다. 난 전혀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뒤로 신경을 껐다.

 올 여름 고척돔에 롯데자이언츠 경기 직관 갔을 때 찍은 사진. 롯데 선수들은 팬들의 응원을 잊지 말기를.
올 여름 고척돔에 롯데자이언츠 경기 직관 갔을 때 찍은 사진. 롯데 선수들은 팬들의 응원을 잊지 말기를. ⓒ 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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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중계가 없는 평화로운 저녁, 난 발주 들어 온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 소설을 끄적인다. 소설을 쓸 때 나에게 가장 어려운 점은 주인공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난 내 소설 속 주인공이 너무 안쓰러워 고난에 빠지기도 전에 피할 길을 만들어 주고,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손을 내민다. 그리하여 밋밋하고 재미없는 소설이 완성된다.

"작가는 좋은 의미의 사디스트여야 합니다. ~ 우리는 주인공의 약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야 합니다. 아픈 곳을 때리고, 다친 곳을 공격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주인공이 변화할 때까지. 고통과 시련에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으니까요. (소설 쓰고 앉아 있네, 159쪽)"

"중요한 점은 주인공이 뛰어넘어야 하는 허들의 높이가 점점 더 높아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 '왜 이렇게까지?' '어떻게 여기까지?' 같은 질문이 독자의 내면에서 피어날 수 있도록 주인공을 몰아붙여야 합니다. (같은 책, 161쪽)"

소설이 써지지 않아 펼친 작법 책에서 나는 롯데자이언츠를 봤다. 만약 내가 글을 잘 쓰는 작가이고, 주인공이 야구선수라면 분명 롯데자이언츠 선수로 했을 것이다. 1992년 이후 우승하지 못한 팀, 2020년 이후 한 번도 가을 야구에 진출하지 못한 유일한 팀. 드디어 되겠구나, 하는 시점에서 예상치 못한 추락을 한다. 사람들은 다 실망으로 등을 돌리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쓰러지지 않고 다시 몸과 마음을 재정비해서 분연히 일어난다.

그렇게 생각하니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때마침 주말에 한 체코와의 2026 WBC 대비 평가전에서 상무에 있는 한동희 선수가 적시타를 쳤다. 한동희 선수는 내년 시즌에 롯데로 돌아올 선수다. 자, 소설이라고 하면 이제 다른 장이 펼쳐졌고, 다른 장소에서 희망의 불씨가 반짝이고 있는 것이다.

비시즌인 지금, 소설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한 롯데 선수들은 열심히 자신의 자리에서 훈련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자리에서 소설을 쓰며 다가올 겨울을 보내면 될 것 같다. 2026 봄, 서로 조금은 성숙한 모습으로 반갑게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롯데자이언츠#야구비시즌#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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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whitekje) 내방

아이들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살아 갈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 나아지기를 바라며 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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