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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방송으로 말하던 사람이 이제 글로 아이에게 말을 겁니다. 전환의 길목에서, 여전히 세상에 말을 걸고 있는 중입니다.
13일, 계약한 출판사에서 메일 한 통을 보내왔다.

'작가님, 20컷 뽑아서 보냅니다. 구체적인 스케치에 들어가기 전, 먼저 러프스케치 보내드립니다. 보시고 의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메일을 여는 순간,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원고를 완성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설렜다. 마치 내가 써 내려간 글들이 이제 '진짜 세상'으로 걸어 나가는 문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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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프 스케치'란 완성되지 않은 그림, 초벌의 선으로만 구성된 스케치다. 아직은 색이 입혀지지 않았고, 형태도 거칠다. 하지만 그 미완의 선 속에서 작가의 글이 살아 숨쉬기 시작한다. 글로만 존재하던 내 이야기들이 그림이라는 형체를 입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글을 쓰던 시간들이 되살아났다. 이 장면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는지, 이 인물의 대사를 써내려가기 위해 몇 번을 고쳐 썼는지, '여기에 환상의 장면을 넣을까? 아니면 현실의 균열을 보여줄까?' 하며 씨름하던 시간들. 그 모든 고민이, 그림 한 장 한 장을 마주할 때마다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러프 스케치는 단순한 그림 초안이 아니었다. 그건 작가에게 자신이 지나온 창작의 길을 다시 걷게 하는 지도였다.

그림 속 한 장면을 볼 때마다, '맞아, 이 장면은 내가 진심을 다했던 곳이야.' '여기선 인물의 감정이 한 번 무너져야 했지.' 그렇게 작가의 눈에는 미완의 선 하나에도 수많은 고민의 층이 겹쳐져 있었다. 그림이 내 글의 기억을 깨워주었고, 내 글이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처럼 느껴졌다.

빈 여백에서의 출발 글이 마음을 그릴 때, 그림은 그 마음을 완성한다
빈 여백에서의 출발글이 마음을 그릴 때, 그림은 그 마음을 완성한다 ⓒ 이효진

아동문학 한 권은 글 작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다. 글이 뼈대를 세우고 살도 붙이며 세계를 완성해 나간다. 그런 글의 세계 위에 그림은 마치 인테리어 작업처럼 공간을 채우고 배경음악처럼 감정을 흐르게 한다. 글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림은 이야기의 감정과 분위기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존재다. 서로의 손끝이 맞닿을 때 비로소 한 권의 책이 완성된다.

이건 어쩌면 가족의 모습과도 닮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족을 지탱하는 손길들. 누군가는 밖에서 세상을 향해 글을 써 내려가고, 누군가는 그 곁에서 묵묵히 색을 입히듯 하루하루를 꾸려간다. 그림 작가가 글 작가의 세계를 빛으로 채워주듯, 엄마는 가족의 하루를 사랑으로 채워준다. 이름 없이, 색감 없이, 그러나 가장 따뜻하게.

러프 스케치를 보며 나는 다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이야기를 처음 썼을 때의 떨림, 문장 하나하나를 완성하고 나만의 세계를 세워가던 그 벅찬 시간들, 그리고 이제 그 글이 그림과 함께 하나의 세계로 태어나는 설렘을 마주한다.

책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누군가의 마음에서 시작되어, 또 다른 누군가의 손끝에서 완성된다. 글과 그림이 만나고, 마음이 마음을 이어주며, 한 권의 책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지금, 나는 안다. 러프 스케치는 단순한 밑그림이 아니라, 서로를 완성시켜주는 따뜻한 여정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는, 아이들의 마음 속에서 새롭게 숨 쉬게 될 이야기 한 편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 개인SNS에도 실립니다.


#러프스케치#전환의길목에서#아동문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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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작가로 가는 길목에서


이효진 (297green) 내방

20년 동안 방송작가로 활동했다. 제주MBC, 아리랑국제방송, 제주 TBN교통방송 등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했으며 현재는 아동문학 작가이자 글쓰기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이자 브런치 작가로 글을 쓰며, 유튜브 채널 '작가의식탁TV'를 통해 초·중등생의 글쓰기와 학습 성장을 돕는 교육 콘텐츠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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