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훈 시인은 17살부터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공장에서 몸으로 체화된 노동을 시로 승화시키며 세상에 진솔한 목소리를 내온 시인이자 행동하는 예술인이다. 공장에서 일을 하던중 석면에 노출되어 진폐증을 앓기도 했다. 시인은 2019년 고향인 충남 홍성에 국내 최초로 노동문학관을 세워 노동예술제와 세미나 등 노동과 관련된 다양한 공연과 전시를 하고 있다.
정세훈의 시인의 시적 언어는 신체에 축적된 피로, 마음속에 남은 상처, 그리고 삶 전체를 짓누르는 노동의 무게가 깊게 자리한다. 하지만 이 시집은 그런 힘겨움에서 벗어나려는 시가 아니다. 오히려 그 현실 위에서 사랑이 어떻게 사람을 살게 하는지 보여준다. 상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 위에 조용히 손을 얹는 사랑의 모습을 중심에 놓는다.

▲정세훈정세훈 시인 신작 시집, 사랑하는 네가 있기에 ⓒ 김인철
사랑하는 네가 있기에
표제시 '사랑하는 네가 있기에'는 시집의 정서적 중심이라고 볼 수 있어서 먼저 읽어보는 것을 권한다. "추울 때 춥다고 말할 수 있다"는 구절이 시인의 진심과 인간적인 연약함, 사랑의 힘을 동시에 드러낸다.
사랑하는 네가 있기에
나는
추울 때
춥다고
말할 수 있다
- P. 74, '사랑하는 네가 있기에' 전문
정세훈 시인과 몇 차례 인연이 있다. 지금은 해산된 진보문학단체 '리얼리스트100'에서 잠시 활동을 같이 했었다. 리얼리스트 100은 현장성이 살아있는 문학인들이 직접 이 사회 곳곳의 부조리한 노동현장과 약자들과 연대하며 그 생생한 노동 소외의 현실을 시와 소설, 르포 등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문학단체였다. 그로인해 박근혜 정권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몸의 중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의 대표작을 소개 한다.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에 실린 '몸의 중심'이다. 이 시 또한 시인이 이전에 발표했던 시처럼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과 약자들을 향한 따듯한 시선을 담고 있다. 손석희 앵커는 2017년 2월 8일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에서 이 시의 일부 구절을 인용하며, 당시 한국 사회의 여러 아픈 현실 <청년 실업>, <가난>, <노동자의 고통>을 짚었다.

▲손석희 앵커브리핑손석희 앵커는 2017년 2월 8일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에서 정세훈 시인의 시 “몸의 중심” 일부 구절을 인용했다. ⓒ jtbc
치유와 희망
이번 시집의 특징을 꼽자면, 오랜 시간 시인의 내면에 쌓여 있던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슬픔, 공감과 연대가 다양한 사유와 진솔한 언어로 그려져 세상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희망의 언어로 표출되고 있다. 시인이 추구하는 '천지간 만물에 대한 사랑법'이다.
"어쨌든, 나의 시편들엔 나의 진한 눈물이 배어 있다. 나의 진한 눈물로 지었기 때문이다. 이는 나를, 시 짓는 길로 인도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가르침 받은, 이웃은 물론 천지간 만물에 대한 사랑법에 따르기 위한 것이다."('시인의 말' 일부)
내 유골 뼛가루 뿌려지듯
나 죽어
내 유골 뼛가루
뿌려지면 좋겠다고
눈여겨보아 둔 곳에
내 유골 뼛가루 뿌려지듯
풀씨를 뿌린다
아름답고 예쁜 풀꽃
함빡 피우길
간절히 기도하며
풀씨를 뿌린다
P. 17, '내 유골 뼛가루 뿌려지듯' 전문
박진희 문학평론가는 "정세훈 시인은 노동 현장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 성실하고도 진솔한 목소리를 내온 실천적 문학가다. 시뿐만 아니라 동시, 동화, 소설, 산문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작품집을 발간해 온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삶과 문학에 대한 열정 또한 대단하다"고 밝혔다.
또한 "정세훈 시인의 시는 대체로 쉽게 잘 읽힌다. 특별한 기교나 현란한 수사도 없다. 이는 '목적이 분명한 시',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시'를 쓰겠다는 시인의 창작 철학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며 "이런 까닭에 그의 시는 의미와 정서가 보다 직접적으로 노출, 전달된다. 그러나 그의 시는 단순할지언정 단조롭지는 않다. 익숙한 듯하지만 어김없이 그 익숙함에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고 논했다.
배추더미
빚더미를
떠안고
무더기로
시장에 나왔다
풀을 뽑아주고
물을주고
솎아주고
매만져준
농부의 시름 가득한
배추더미
P. 28, '배추더미' 전문
이 시집에는 화려한 고백이나 거대한 서사가 없다. 대신 작고 잔잔한 행위, 익숙한 풍경, 사소한 말 한마디 속에서 사랑의 본질을 발견한다. 정세훈 시인이 말하는 사랑은 특별한 순간에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이어지는 생활 속에 스며 있는 아주 작은 빛이다.
삶을 지탱하는 이유
사람 때문에 살아가는 삶이다. 그리고 사랑은 삶을 지탱하는 마지막 이유다. 이 시집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그 지점에 있다. 표제시에서도 드러나듯, 시인에게 사랑은 "추울 때 춥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다. 사람은 혼자일 때는 약해도, 누군가가 곁에 있을 때 비로소 마음을 열고 견딜 힘을 얻는다. 시인은 바로 그 순간의 진실을 깊이 파고든다.
시인은 사랑을 "풀잎과 꽃을 피워내는 빛"으로 비유한다. 그만큼 이 시집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도를 다룬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생기는 내면의 변화, 그리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때 찾아오는 회복을 보여준다. 그 따뜻한 온기 속에서 상처받은 인간이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표현한다. 시인의 시를 나에게 투영하자면, 사람 때문에 살아가는 삶이자, 사랑이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마지막 이유다. 나 역시 사랑하는 네가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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