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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창밖으로 새벽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습니다. 잠은 좀처럼 오지 않고, 자꾸만 휴대폰 쪽으로 손이 가더군요.

'들어왔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스마트폰 속 은행 앱을 열었습니다.

통장에 찍힌 첫회국민연금 잠이 오지 않는 밤, 02:50분즈음 확인한 입금 정보
통장에 찍힌 첫회국민연금잠이 오지 않는 밤, 02:50분즈음 확인한 입금 정보 ⓒ 이종범

"첫회 국민연금… +0,00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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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숫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더 놀라웠던 건 입금 시간이었습니다. 02시 32분 07초.

'이렇게 이른 시간에?'

순간, 적잖이 놀랐습니다. 입금된 것도 좋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각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습니다.

평소 금융거래를 할 때 "받을 돈은 늦게 들어오고, 빠져나갈 돈은 생각보다 빨리 나간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2025년 11월 25일은 깊은 새벽부터 그 생각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이젠 일하지 않아도 매월 들어오는 돈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 안에 담긴 세월이 나를 건드린 걸까요. 마치 인생 첫 월급을 받았던 사회초년생 때처럼 묘한 설렘이 가슴 한쪽에서 올라왔습니다. 그 안에는 굴곡진 나의 세월이 녹아 있었으니까요.

34년 동안 한 달도 빠짐없이 납부했던 그 긴 시간들이 오늘 새벽, 이렇게 약속된 숫자로 돌아왔는데 왜 안 그럴까요.

'종신 월급'이라서 그런지 눈은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동안의 시간을 되짚고 있었습니다.

새벽 출근길, 야근하던 밤, 회식 자리에서 원치 않던 술잔을 들이키며 상사의 비위를 맞춰야 했던 순간들까지. 그 모든 시간이 마치 나를 위한 선물처럼 통장 속에 차곡차곡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받은 이 새벽 선물은 '이만큼 잘 살아왔다'고 말해주는 묵직한 인사처럼 느껴지더군요. 물론 돈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지나온 세월이 조용히 박수받는 것 같은 느낌이 더 컸으니까요.

선잠 끝에 맞이한 11월 25일 아침, 새벽비를 맞은 우리 집 감나무 잎들은 거의 다 떨어져 있더군요. 촉촉이 젖은 감나무를 지나 또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퇴직 후 4년차를 시작하는 지금, 명함은 바뀌었지만, 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강의실에서 사람을 만나고, 콘텐츠를 기획하고,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드는 일로 하루를 채워갑니다. 돌이켜보면 퇴직은 내게 '일이 끝난 날'이 아니라 '일의 형태가 바뀐 날'이었습니다. 정해진 출근길은 이미 사라졌지만, 일상의 리듬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오늘도 집 앞 대로변 M커피숍으로 향했습니다. 강의가 없는 날엔 늘 그렇듯,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이제는 내 지정석처럼 익숙해진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연금이 입금된 날이라 그런지
햇빛 없는 창밖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언제나 익숙했던 거리인데 오늘은 유난히 낯설고 새로운 느낌입니다.

'이제 나도 국민연금을 받는 사람이구나.'

그 생각 하나가 마음 한켠을 따뜻하게 덮어주는 오늘을 시작합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통장을 열어보았습니다. '첫회국민연금'이라는 표현이 괜히 더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그건 단순한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 숫자는 내가 살아온 시간, 흘려보낸 청춘, 그리고 묵묵히 버텨온 시간의 증거였으니까요. 내 삶을 스스로 책임져 온 작은 훈장 하나를 받은 것처럼 말이죠.

젊은 시절엔 내 월급에서 국민연금 보험료를 매달 떼어 가는 게 아깝기만 했습니다. '내 돈을 왜 이렇게 많이 떼어 가나.' '언제 받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생각을 자주 했으니까요.
하지만 간사하게도, 지금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돈은 결국 오늘의 나를 위해 과거에 미리 보내 둔 선물이었으니까요. 젊을 땐 몰랐지만 이제는 압니다. 그 꾸준함이 결국 나를 지켜준다는 사실을요.

이제부터 매달 25일엔 일 때문에 받는 소득에 국민연금이라는 또 다른 '시간의 월급'이 더해질 겁니다. 일을 하든 안 하든, 아프든 건강하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끝까지 나를 지켜주는 약속 같은 돈 말입니다.

강사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매달 4시간 분량의 강의료가 아무런 평가도 없이 자동으로 입금된다고 상상해 봅니다. 그게 바로 국민연금이 주는 힘이 아닐까요.

그러고 보면 국민연금은 일의 대가가 아니라, 34년간의 직장생활을 인정해주는 조용한 증명서 같습니다.

"오늘, 내 이름으로 종신 월급이 들어왔습니다."

국민연금 알림 톡 10시 59분 받은 국민연금 알림톡
국민연금 알림 톡10시 59분 받은 국민연금 알림톡 ⓒ 이종범







#국민연금#종신월급#노후준비#공적연금#첫연금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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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의 은퇴이몽

퇴직 이후 40년을 ‘어떻게 버틸까’가 아니라 ‘어떻게 다시 살아볼까’라고 묻는 사람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듣고, 설명하고, 함께 고민해 온 이야기를 강의와 글로 천천히 풀어냅니다. 거창한 비법보다, 같이 버틸 수 있는 ‘노후해법’을 독자들과 함께 찾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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