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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떠나셨으나 시계는 숨 쉬고 있다. ⓒ 임혜영
어머니 집에서 분리수거 할 재활용품을 정리하다 한 뭉치의 손목시계를 발견했다. 어머니께 여쭈니, "다 버릴 것"이라고 한다. '아깝지 않냐'고 했더니, "오래된 것만 버리는 것"이며 "서랍 안에 좋은 시계가 아직도 많이 있다"고 하신다. 생전에 중고 시계와 만년필 등을 수집하였던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할 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있다.
"기껏 사 놓고 아끼기만 하다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갔네."
사람은 떠나도, 물건은 숨 쉰다
나는 어머니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얼마 전 읽은 기사를 말해드린다.
"'청포도'로 유명한 시인 이육사 아시죠. 조국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시로 담아낸 시인인데, 40년 짧은 생애 동안 옥살이만 열일곱 번을 하셨대요. 결국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했는데, 그 이듬해 해방이 되었대요. 몇 개월만 더 기다렸다면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을 보았을 텐데... 운명은 기다려주지 않나 봐요. 아쉽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겠어요."
한 상자 가득 들어 있는 시계를 하나하나 꺼내어 살펴보는데, 절반 넘게 시침, 분침이 움직이고 있다. 사람은 떠나고 없으나, 그가 남긴 물건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어머니가 어떤 고급스러워 보이는 시계를 집더니 말씀하신다.
"이건 소영이 아버지(큰 이모부)가 일본 갔다 오면서 선물로 사 온 건데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네."
60여 년 전, 아버지의 손위 동서인 큰 이모부가 선물한 시계 이야기였다. 그 시계를 선물한 소영이 아버지도, 소영이(사촌 언니)도, 선물을 받아 간직하던 우리 아버지도 이제는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시계만 남아 옛 추억과 옛 사람을 떠올리게 해준다.
지난 가을, 일본 여행 중 지방 도시를 산책한 적이 있다. 어느 건물을 지나가는데 지인이 "여기가 윤동주가 다니던 도시샤 대학교"라고 알려주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윤동주의 시를 떠올려보았다.
그는 연희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 릿쿄대를 거쳐 도시샤대로 편입해 조선 독립을 논의하는 유학생 단체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문 끝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1945년 2월 16일, 28세의 나이로 옥사했다고 한다.
남은 것들은 여전히 숨 쉰다
몇십 년 후 윤동주의 시에 감동한 도시샤대, 릿쿄대 후배들이 윤동주 기념비 건립을 위한 모금 활동을 한 후 기념비가 세워졌다. 후배들이 타국의 선배를 기리는 모습에서 국적을 초월한 숭고함을 느낀 것이다.
내가 특히 감동한 부분은 윤동주가 당시 거대한 역사적 흐름에는 거리를 두고 시 창작을 계속했다는 점이다. 민족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의 소용돌이에 많은 학생이 휘말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는 중심을 잃지 않고, 독립을 고민하면서도 쉬지 않고 시를 썼다.
그래서 윤동주가 남긴 시를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읽는다. 사람은 떠나고 없으나, 그가 남긴 것들은 아직도 숨 쉬며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어느 국가에나 영광과 고통이 공존하듯이 한 사람의 인생도 그러하다. 아버지 역시 누구나와 다름없이 영광도, 고통도 다 누리셨을 것이다. 중고 손목시계를 집어들며 좋아하셨을 아버지를 떠올린다. 이제야 나는 아버지가 마음속에 품었을 진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가족에 대한 사랑을, 타인에 대한 연민을, 어렵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선의와 베풂을 떠올리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향을 물려받는다. 내면의 부를 이어받는다.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가 남긴 시계를 가만히 응시한다. 시간과 겨루어 슬프지 않은 것이 있을까. 진즉 부모의 애환에 공감하지 못했음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슬픔을 머금는다. 슬픔 속에서만이 설익은 생각이 좀 더 깊어지는 것 같다.
나는 요즘 남자 손목시계를 차고 다닌다. 시계를 보며 뿌듯함을 느낀다. 값비싼 명품을 남겨주시지는 않았지만, 시대를 넘어 인간의 선의가 결국 세상을 이끈다는 삶의 진리를 알려주신 아버지의 시계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옆에 있는 이에게 은근슬쩍 손목을 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