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해 뜨는 분산성분산성 동문 성벽에 햇볕이 부딪친다. 부산 금정산 위로 해가 오르자, 산성의 굵은 성벽이 황금빛에 휩싸인다. 그 아래로 꿈틀거리는 용처럼 낙동강이 힘차다. ⓒ 이영천
아침 햇살이 골짜기를 메우자, 김해 분성산이 황금빛에 휩싸인다. 지난 10월 하순, 분산성으로 오른다. 길이 가파르진 않았지만, 내딛는 걸음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가쁜 숨결에 나뭇잎이 흔들리고, 성문에 들어서니 바람이 시원하게 인사한다. 성곽이 몇 겹으로 두터워 듬직하다. 천년의 시간이 한꺼번에 다가든다. 겪어온 풍상을 쏟아내고 싶었는지, 성문이 조용히 입을 연다.
독수리처럼 넓어지는 시야
유려한 곡선의 성벽이 멀리 낙동강을 바라본다. 억새가 머리를 흔들어 서문으로 안내하고, 아래로 가락국 왕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독수리처럼 시야가 넓어진다. 저 아래 봉황대 옆이 옛 금관가야 왕궁이었다.
분산성은 왕성을 지키는 호위무사였다. 멀리서 북소리가 울리면, 철갑 입은 가락국 병사들이 성벽에 열 지어 섰다. 먼 산 너머로 신라군이 먼지를 일으키던 날에도, 이곳에서 그들은 끝까지 성을 지켰으리라.
성곽을 따라 도니, 남쪽 봉수대에 닿는다. 앞에 펼쳐진 풍경이 거대한 수묵화 같다. 동으로 용처럼 휘어진 낙동강이 흐르고, 서로는 평야와 산들이 키를 재며 올망졸망하다. 남쪽에는 바다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거린다. 숨을 고르고 앉으니, 바람이 귓불을 스쳐 간다. 바람이 천년의 풍상을 싣고 왔을까. 거센 아우성이 바람에 실려 왔다.

▲옛 왕성분산성 봉화대 앞 성벽에서 바라 본 옛 가락국 왕성 터. 옛 흔적을 간직한 시가지가 아침을 열고 있다. 멀리 바다였던 평야가 넓어, 풍성하고 넉넉하다. ⓒ 이영천
걸음을 옮겨, 성벽에 앉아 사방을 둘러본다. 세 겹으로 높이를 달리한 성벽이 육중하다. 분산성은 단지 몇 겹의 돌로 쌓은 성만은 아니었다. 옛 선인들의 삶과 애환, 고난과 희망이 성과 함께 쌓여 있었다.
다음엔 꼭 다른 계절에 분산성에 오르리라. 벚꽃이 흩날리는 때나, 매서운 눈발이 날려도 상관없다. 산성에서 다시 옛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뒤따르는 이들에게 반드시 들려주고 싶어서다. 여기는 단순한 산성이 아닌, 장대한 서사이자 시간에 묻힌 가락국의 숨결이라고.
김해읍성
김해읍성은 조선 시대에 한정된다. 금관가야가 왕성으로 삼았던 고성(古城)의 4분의 1 크기로 추정한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남문(진남문)과 북문(공진문)을 잇던 도로가 정확하게 동상동과 서상동의 경계다.

▲김해읍성 북문복원된 김해읍성 북문(공진문)의 옹성과 문루. 문루 안쪽은 열려 있으나, 밖은 출입이 어렵게 막혀있다. 옹성 위로 멀리 분산성이 하얀 띠처럼 보인다. ⓒ 이영천
훼철 당시 지적(地籍)을 근거로 1.95km 둘레에 약 4m 높이로 추정한다. 처음 쌓을 당시의 4418척이 1.35∼1.51km임을 고려하면, 후대에 성곽을 확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체로 복원된 북문을 중심으로 동광초교 왼쪽 길, 김해중학교 윗길과 수로왕릉 오른쪽 길을 경계로 성벽이 지났으리라 추정한다.
기록마다 차이는 있지만, 세종 때인 1431년 축조한 성곽에 왜구 침략이 빈번했나 보다. 문종 때인 1451년 해자 등 방어 시설을 갖췄다는 기록이 이를 보완 설명하고 있다. 일제의 '읍성 철폐령'이 공표되기 전인 1895년부터 훼철되었다. 왕비가 시해 당한 을미년이니, 나라가 온통 풍진에 어지러울 때다.

▲왕성 터 비문김해읍성 객사(분성관)가 있었던 곳 후원에 사찰이 자리한다. 사찰의 탑 뒤에 서 있는 '駕洛古都宮墟(가락고도궁허)' 라는 비가 옛 왕성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 이영천
읍성을 대표하는 시설인 객사가 '분성관(盆城館)'이니 분성산이건 분산성이건 가락국 유산을 어떤 식으로든 이으려 했음을 엿볼 수 있다. 객사 자리에 시장이 앉았고, 객사 후원에는 사찰과 석탑이 우뚝하다. 그 뒤에 '가락고도궁허(駕洛古都宮墟)' 비가 서 있다.
그나마 북문이 남아 김해에 읍성이 있었음을 외롭게 웅변하고 있다. 바다가 언제 메워졌는지 불분명하다. 퇴적이 서서히 진행되었을 터다. 평야로 메워진 건 대체로 1천 년대 즈음으로 본다. 고려 중반에서 후반으로 접어드는 시기다.
따라서 곡창인 이곳에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가 가장 빠르게 와 닿았으니, 읍성을 쌓아 방비하는 건 필수였다. 김해읍성엔 3만 명 가까운 인구가 거주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법 큰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가락국 왕성
김해(金海)라는 지명은 '쇠가 생산되는 바닷가 고을'이라는 뜻이 유력하다. 변한 때부터 철의 생산지로 유명했다. 가야 시조인 수로왕이 금합에서 나온 황금알에서 탄생했다 해서 '쇠 金(금)'을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김씨 세력의 바다 곁 고을'이라는 설도 그럴싸해 보인다.

▲김해부_해동지도김해부 옛 지도. 네모난 성곽이 도드라져 보이고, 물길과 산맥 위주로 그려졌다. 지도 상단에 각각 '駕洛臨海(가락임해), 金官金州(금관금주), 金寧盆城(금녕분성)'을 써서, 김해와 관련된 옛 지명을 기록하고 있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삼국사기 지리지>의 소개를 보자.
'김해소경(金海小京)은 옛 금관국(가락국이라고도 하고 가야라고도 한다)이다. 시조 수로왕으로부터 10대 구해왕(仇亥王)에 이르러… (중략) …신라 법흥왕 19년(532)에 백성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여 그 땅을 금관군(金官郡)으로 삼았다. 문무왕 20년(680)… (중략)…에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경덕왕 때 이름을 김해경(金海京)으로 고쳤다. 지금의 김주(金州)이다.'

▲수로왕릉가락국 시조이자, 김해 김씨 시조인 수로왕릉이다. 옛 가락국의 국력을, 왕릉의 봉분 크기가 보여주고 있다. ⓒ 이영천
즉 김해라는 지명은 신라 경덕왕 때 부여되었다. 우리나라 최대 성씨 중 하나인 '김해 김씨'도 따라서 이때 생겼다고 유추한다. 물론 시조는 수로왕이다. 이에 중시조는 구해왕으로 보아야 한다. 그의 3남인 김무력이 김유신의 할아버지다. 그러니 김해 김씨의 번성은 삼국통일이 이뤄진 7세기 후반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금관가야 5백 년의 도읍이다. 지금의 김해평야 대부분이 바닷물로 넘실대던 때다. 쇠의 강국이었던 가락국이 어느 위치로 성곽을 쌓았는지는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지금의 봉황대에서 남산에 이르는 남쪽과 대성동 고분군에 이르는 서쪽, 동서를 잇는 길 '구지로-가야로' 인근의 북동쪽과 구지봉을 아우르는 거대 왕성이었다는 설이다.

▲대성동 고분군왕성 서쪽 가장자리로 추정된 곳에, 가락국 왕족과 귀족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고분군이다. ⓒ 이영천
봉황동·대성동·구산동 일대에서 왕궁터로 보이는 대형 건물지와 도로 유구, 우물, 저장고 등이 다수 발굴되었다. 가락국 왕성의 실체를 눈감고 더듬는 것일 수도 있다. 마치 '코끼리 만지기'처럼 말이다. 그래도 놓치지 말고, 찾아 나가야 한다. 대성동 고분군이 가락국 왕족과 귀족 무덤으로 왕릉 역할이었음이 분명하니 말이다.

▲왕후릉구지산 자락에, 수로왕릉과 동떨어져 왕후릉이 자리한다. 옆에 보이는 파사각에는, 왕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직접 싣고 왔다는 보라빛이 감도는 '파사석탑'이 서 있다. ⓒ 이영천
왕성은 해상 무역의 중심이기도 했다. 따라서 왕성에 항구가 결속된 복합 도시였을 가능성도 열어 두어야 한다. 왜는 물론 멀리 인도까지 뻗어나갔다. 허황후를 맞이한 수로왕 전설이 허황한 이야기가 아닌 까닭이다. 발굴된 도로 유적 중 목재로 만든 도로 흔적에 주목한다. 배에서 내린 물자를 수레로 옮기기 편하도록 설계된 도로다. 가락국이 보여주는 발달한 토목 기술의 극히 일부분이다.
허용 가능한 범위에서 봉황동과 구산동 일대가 발굴되기를 소원한다. 가락국 왕성이라는 고고학적 가치가 밝혀져, 고대 왕국으로써 위상이 재조명되길 바란다. 아울러 일본이 여태껏 억지 부리는 '임나일본부'가 허무맹랑한 거짓임이 속히 드러나길 원한다.
분산성
김해 어디에서건 눈을 들면 보이는 산성이다. 돌이 두른 900m가 하얀 띠처럼 산봉우리를 감쌌다. 가락국 왕성 방어를 최우선으로 구축했다고 추정한다. 빈약한 유물이나마 통일신라 이전에 쌓았음을 증언하고 있다.

▲분산성_서벽두터운 몇 겹의 서쪽 성벽이, 유려한 곡선으로 계곡을 향해 길게 뻗었다. ⓒ 이영천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고자, 등 뒤 가락국을 점령했다고 말하고 있다. 항구를 가진 복합 도시 왕성을 점령해야 할 필요와 당위성은 차고도 넘쳤을 것이다. 중앙 집권체제로 발전하지 못하고 여섯의 느슨한 연맹 체제로 버티던 가야는, 신라의 맞춤한 사냥감이었다. 철기라는 발달한 무기를 가졌어도, 신라를 당해내지 못한 원인이다.
멸망한 나라의 왕족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김무력-김서현-김유신'으로 이어지는 후손은 신라 왕족과 혼맥 등으로 이어져 유력 가문으로 부활한다. 지금도 우리나라 최대 성씨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수로왕 터전이 5백 년이라면, 그 후손은 2천 년을 이어 온 셈이다.
박위(朴葳) 장군이 있었다. 이성계와 위화도에서 회군한 주역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고려 말에 왜구가 극성을 부린다. 이에 박위가 김해에 온다. 박위는 분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금방 알아본다. 정몽주의 기록에 따르면 "1387년 박위가 분산성을 고쳐 쌓았다"고 한다. 언제건 왜구는 다시 발흥할 것이라 여겨서다.

▲봉화대분산성 남쪽 가장 높은 봉우리에 봉화대를 두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萬丈臺(만장대)' 표지석이 왼쪽에 작게 서 있다. ⓒ 이영천
1389년에 경상도 도순문사가 되어, 전함 100여 척을 이끌고 왜구 본거지인 대마도를 공격하여 적선 300여 척을 불태우는 등 왜구 소탕에 큰 공을 세운다. 조선 개국 후에도 왜구 소탕에 힘을 쏟는다. 그러나 1398년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피살되고 만다. 유려한 곡선으로 휘어져 나가는 분산성에서, 용맹했던 그의 유연함이 도드라져 보인다. 허무한 죽음이 애처롭다.
바다를 끼고 번성한 왕성이 김해였다. 왕성을 지키려는 가락국 군사들의 함성이 분성산의 산성에 하얀 띠로 둘러쳐 있다. 잎을 떨군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무시로 불어 나가며 '휘-' 소리를 낸다. 오래된 시간이 바람에 곁을 내어주었을까. 흔적도 없는 왕성이 땅에서 갑자기 솟아 오르는 환영을, 분산성 봉수대에서 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