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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1월 29일 서울 월드컵공원 평화광장에서 특별한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이름하여 '슬로우런(Slow Run)'. 빠른 기록을 자랑하지도, 완주를 강요하지도 않는 이 이상한 마라톤은 '경쟁과 속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달리기'를 표방한다. '슬로우런'은 모든 참가자가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달린다.

누구는 뛰고, 누구는 걷고, 또 누구는 휠체어를 밀며 나아간다. 기록을 측정하나 경쟁하지 않고, 상금도, 완주증도 없는 달리기다. 하지만 이 '느린 달리기'는 그 어느 마라톤보다 뜨겁고 단단하다. 왜냐하면, 이 대회는 정부나 기업의 후원 없이 오직 참가자들의 자발적 힘으로 시작된 마라톤이기 때문이다.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시 신는 운동화

 슬로우마라톤 누리집 사진.
슬로우마라톤 누리집 사진. ⓒ 슬로우마라톤 누리집 갈무리

참가자들 중에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가족들이 많다. 독성 물질로 폐를 잃고, 가족을 잃고, 일상을 잃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때 달리기는커녕, 계단 몇 개를 오르는 것도 버거워 한다.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의 몸으로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시 운동화를 신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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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몇 걸음도 못 갔어요. 지금은 조금이라도 달릴 수 있다는 게 감사하죠."

폐 손상 3급 판정을 받은 한 피해자는 웃으며 말했다. 그에게 슬로우런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회복의 길'이자 '기억의 행진'이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잊히지 말아야 할 고통이 떠오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멈출 수 없다. 행사 당일, 가장 분주한 곳은 음식 부스가 될 예정이다. 피해자 가족들이 직접 김밥을 말고, 어묵 국물을 끓이고, 귤·바나나·떡·초콜릿 등을 하나하나 정성껏 포장한다.

"이건 우리가 참가자를 맞이하는 방법이에요. 함께 뛸 수 없지만 이렇게라도 참여하고 싶어요."

유가족이자 피해자인 김태윤님의 말이다. 그들의 음식을 먹는다는 건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그들의 기억을 함께 삼키는 일이다. 뜨거운 어묵 국물의 김이 피어오르는 순간, 이 대회는 마라톤이 아니라 기억과 환대의 축제가 된다.

참가자들 중 누군가는 "고맙습니다"라고, 누군가는 "기억하겠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 짧은 인사 한마디가, 그동안 잊혔던 피해자들이 견뎌 온 시간을 위로할 것이다.

이 대회는 환경부나 환경산업기술원, 가습기살균제 기업 등 어느 곳에서도 지원을 받지 못했다(지난 6일 시점). 행정기관의 도움도, 기업의 후원도 없었다. 그럼에도, 피해자 가족들은 직접 돈을 모으고, 홍보물을 인쇄하고, 부스를 세운다. 운영비는 모두 자비와 시민 단체들의 작은 기부로 충당된다. 음식 재료비, 음료, 현수막, 그리고 나무 메달까지. 그 모든 것이 연대의 흔적이다.

평화공원에서 출발해 추모의 숲으로 향하다

 슬로우런 기념티셔츠
슬로우런 기념티셔츠 ⓒ 슬로우런 누리집 갈무리

슬로우런이 평화공원을 출발지로 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 바로 옆, 노을공원 안에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추모의 숲이 있기 때문이다.이곳에는 1700명이 넘는 희생자를 기억하는 숲이 조성되어 있다. 참가자들은 달리기를 마친 뒤 여유가 되는 참가자들은 그 숲으로 발길을 돌려 보아도 좋을 듯하다.

그곳은 단순한 목적지가 아니라, 이 대회의 이유이자 출발점이다. 환경이 파괴되고, 기업의 책임이 외면된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이곳을 잊지 않는다"는 다짐의 자리다. 그래서 슬로우런은 단순히 '달리는 행사'가 아니라 기억을 향해 걷는 순례이다. 숲을 돌아보는 그 시간은 곧 묵념이자 약속의 시간이다.

"이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2011년 정부가 피해 실태를 인정한 이후에도, 피해자 수는 7000명을 넘어섰다. 그중에는 여전히 치료 중인 환자, 후유증으로 직장을 잃은 사람, 성인이 되어도 폐 기능이 절반에 머무는 청년들이 있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은 스스로를 피해자로만 남겨두지 않았다. 슬로우런은 그들의 선언이다.

"이제 우리도 세상을 위해 달리고 싶다."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힌 사람들의 존재를 세상에 다시 알리기 위해서다. 기후위기와 환경오염이 일상이 된 시대, '느림'은 가장 혁신적인 메시지다. 속도를 늦추는 것, 기다리는 것, 기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의 속도다.

"내가 달리는 페이스가 가장 멋진 페이스다"

슬로우런의 공식 슬로건이다. 이 문장은 달리기의 철학이자,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빠른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리듬으로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이 진짜 주인공이다. 대회 관계자인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 전남병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경쟁하는 세상에서 잠시 멈춰, '느리게 사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그 말처럼 슬로우런은 단 한 사람도 뒤처지지 않는다. 몸이 아파도, 숨이 차도, 각자의 페이스로 완주하는 모든 이가 '가장 멋진 러너'다. 삶은 종종 마라톤처럼 길고, 고통스럽다. 누군가는 숨이 차서 멈추고, 누군가는 넘어지고, 누군가는 너무 빨리 달리다 길을 잃는다. 슬로우런은 그런 우리에게 말한다.

"괜찮습니다. 천천히 가도 돼요. 함께 달리는 한, 멈추지 않았습니다."

후원도, 스폰서도, 화려한 무대도 없지만 이 '이상한 마라톤'은 세상을 다시 숨 쉬게 한다. 평화공원에서 출발해, 추모의 숲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서 사람들은 묵묵히 달린다.

[슬로우런 관련 정보]

- 행사명 : 슬로우런(Slow Run)
- 장소 : 서울 월드컵공원 평화광장
- 일시 : 2025년 11월 29일 토요일
- 주최 : 사단법인 마포공동체라디오
- 주관 : 가습기살균제피해회복대책모임,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공인법률센터 파이팅챈스, 한국교회 인권센터
- 참가 신청 : https://slowrun.kr
- 슬로건 : "경쟁과 속도로부터, SLOW" / "내가 달리는 페이스가 가장 멋진 페이스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변상철씨는 공익법률지원단체 '파이팅챈스' 국장입니다. 파이팅챈스는 국가폭력, 노동, 장애, 이주노동자, 환경, 군사망사건 등의 인권침해 사건을 주로 다루는 법률 그룹입니다.


#파이팅챈스#가습기살균제#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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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뒷이야기 : 공익법률지원센터 파이팅챈스 백브리핑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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