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동부지방법원 (자료사진) ⓒ 연합뉴스
같은 검찰, 다른 목소리
지난 10월 29일, 서울동부지법 형사합의부 법정. 검사는 결심공판에서 구형에 앞서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천천히 헌법 제12조를 낭독했다.
"대한민국 헌법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서 국가 형벌권을 행사하도록 하고 있고, 형사사법 절차는 헌법 정신을 위반하는 최후의 보도이며, 정의는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게 개인의 존엄과 가치를 중심 때 완성됩니다."
잠시 후, 그는 말했다.
"피고인에게 억울함이 없도록 피고인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는 마땅히 지켜져야 할 절차적 진실이 원심에서 지켜지지 아니하였고, 이로 인하여 더 이상 실체적 진실을 온전히 담아 낼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피고인에게 무죄를 구형합니다."
방청석에서는 유족들의 흐느낌이 들렸다.
"마지막으로 오랜 시간 기다려 주신 피고인과 피고인의 유족에게 깊은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검사의 위로가 더해졌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를 상대로 검사가 헌법을 근거로 무죄를 구형하는 장면은, 오랜 과거사 재심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이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은 11월 4일, 다른 재심 법정에서는 또 다른 검사가 이렇게 말했다.
"위에서 아직 입장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증거 확보 중입니다." (고 박기홍 재심)
또 다른 재판에서는 "기록이 없고, 재심사유가 부족하다"(고 문영석 재심)는 답변이 돌아왔다.
같은 검찰, 그러나 전혀 다른 목소리. 한쪽은 헌법을 읊었고, 다른 쪽은 과거의 기록을 찾고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혀낸 국가폭력의 진실을 여전히 법정에서 증명해야 하는 한국의 현실이다.
진실화해위가 밝힌 진실, 법정에서 다시 의심받다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3년간 1000건이 넘는 국가폭력 사건을 재조사했다. 그중 상당수가 1970~1980년대 보안사, 치안본부,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조작된 간첩 사건이었다. 위원회는 고문, 불법구금, 허위자백 등 명백한 인권침해를 확인하고, 피해자에 대한 국가 사과와 재심을 권고했다.
그러나 문제는 법정에서 시작된다. 위원회의 결정은 행정적 효력만 있을 뿐, 법적 구속력이 없다. 결국 재심 절차가 개시되면, 다시 검찰이 '당시의 수사가 적법했는지'를 따지게 된다. 그 결과, 피해자는 한 번 더 "진실"을 증명해야 한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위로와 사과는 재심과정의 법정에서 그대로 뭉개졌다.
네 개의 재심, 네 가지 검찰의 태도
1. 강을성 사건 - 헌법을 낭독한 검사
1974년 보안사가 조작한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 강을성씨. 2023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강씨는 불법 구금·고문으로 허위자백을 강요당했다"며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2025년 10월 29일, 재심 결심공판에서 동부지검 검사는 헌법 제10조를 낭독하며 무죄를 구형했다.
이 장면은 국가폭력 사건 재심의 역사에서 보기 드문 순간이었다. 법의 이름으로 폭력을 용인했던 검찰이, 헌법의 이름으로 그 폭력을 부정한 것이다. 그날의 재판은 한 개인의 명예회복을 넘어, 조직의 자성으로 읽혔다. 하지만 이 장면은 너무나도 낯설고 예외적인 장면이었다.
2. 정진태 사건 - "증인을 불러야 한다"
10월 28일 남부지원, 1970년대 보안사에 의해 조작된 또 다른 간첩사건의 피해자 정진태씨. 올해 4월 진화위는 고문과 불법구금을 인정했지만, 재심에서 검찰은 "당시 수사관의 증언이 필요하다"며 증인신문을 요구했다.
이미 가해 수사관이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술을 마쳤고, 진실화해위원회가 이를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다시 과거의 수사관을 법정에 세우겠다고 주장했다. 재판은 그만큼 지연됐다.
정진태씨는 "국가가 다시 고문하듯 진실을 다시 말하게 한다"고 토로했다. 검찰이 재심을 협력하기보다 '진실화해위 결정의 정당성'을 다시 검증하려 드는 태도였다.
3. 박기홍 사건 - "위에서 아직 입장 정리가 안 됐다"
지난 11월 4일 부산지법에서 열린 박기홍씨 재심 공판기일에서도 검찰의 태도는 모호했다.
"위에서 입장이 정리되지 않았다."
"증거를 확보 중이다."
결국 검찰은 사건의 본질적 판단을 미루고, 관련인을 증인으로 부르겠다는 입장만 밝혔다. 재판부는 증인신문을 허가했지만, 그만큼 재심은 또 미뤄졌다. 피해자 측 변호인은 "진실화해위 결정이 이미 나왔는데, 검찰은 왜 다시 증거를 찾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검찰은 "증거 확인이 필요하다"는 입장만 반복했다.
'입장 미정'. 그것이 바로 국가가 다시 피해자에게 준 답변이었다.
4. 문영석 사건 - "기록이 없다, 재심사유 부족하다"
법무법인 원곡에 따르면, 지난 10월 30일 광주고법에서 재심 개시 전 심문기일에 출석한 검사는 이전의 검찰 태도와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기록이 없는 상황이라 판단이 어렵다."
"진화위 권고가 있지만 재심 사유로는 부족하다."
"재판부 판단을 존중하겠다."
결국 재판부는 피고인 측에 "그럼 진실화해위에 사실조회 신청을 해보라"고 말했다. 피해자는 다시 국가기관에 '기록'을 요청해야 했다. 불법구금의 피해자가, 다시 국가의 기록을 찾아야 하는 아이러니. 국가는 두 번 침묵했다. 한 번은 고문으로, 또 한 번은 기록으로.
이 네 사건의 당사자는 서로 다른 인물이지만, 같은 구조 위에 서 있다. 진실화해위가 진실을 인정한다. 검찰이 "기록이 없다"거나 "입장이 정리되지 않았다"고 한다. 재판부가 "증거를 보완하라"고 한다. 피해자 측이 다시 사실조회, 자료요청, 증인신청을 한다.
결국 피해자는 또다시 국가폭력의 증거를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책임을 떠안는다. 국가가 고문하고, 국가가 기록을 없애고, 이제 국가가 "기록이 없으니 증거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 재심 법정의 구조적 모순이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 제도적 구조의 결함
1. 진실화해위 결정의 '참고자료화'
현행법상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결정은 재심의 직접 증거가 아니라 '참고자료'로만 인정된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위원회 판단은 일방적"이라며 다시 사실확인을 요구한다. 결국 위원회가 밝힌 진실은 '법정에서 다시 입증해야 하는 사실'로 전락한다.
2. 검찰의 일관된 지침 부재
재심 사건을 다루는 통일된 기준이 없어, 어떤 검사는 헌법을 읊으며 무죄를 구형하고, 또 다른 검사는 "입장 미정"이라 말한다. 정의는 제도화되지 못한 채, 검사 개인의 양심에 의존하는 상태에 머문다.
3. 국가기록의 부재가 검찰의 면피 수단이 된다
보안사·치안본부 등 주요 가해기관의 기록은 대부분 폐기·비공개 상태다. 그러나 검찰은 이 기록 부재를 피해자 불리의 논리로 활용한다. 국가가 기록을 없애놓고, 그 부재를 근거로 피해자의 진술을 의심하는 구조다.
'헌법을 읊은 검사'의 의미
강을성 재심 결심공판에서 헌법 제10조를 낭독한 검사는, 조직을 대신해 사과했다. 그 한 문장은 단순한 수사 구형이 아니라, 헌법적 회복의 선언이었다. 그러나 이 발언은 조직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 한 개인의 결단이었다. 불과 일주일 뒤, 같은 검찰 조직 안에서 또 다른 검사들은 여전히 "기록을 찾고" 있었다.
헌법을 읊은 검사는 정의의 예외였고, 기록을 찾는 검사는 검찰의 평범이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
1. 진실화해위 결정의 법적 구속력 부여
→ 재심에서 위원회 결정문을 '공적 증명력 있는 자료'로 인정해야 한다.
2. 검찰 과거사 전담기구 설치
→ 사건별로 달라지는 대응을 통일하고, 피해자 중심 접근을 제도화.
3. 국가기록 복원 및 공개 의무화
→ 폐기된 보안사 기록을 추적·복원할 수 있는 독립 조사권 부여.
4. 피해자 중심 재심 절차 개선
→ 진화위 조사결과만으로도 재심 개시 및 무죄선고가 가능하도록 증명책임 완화.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을 밝혀도, 법정에서는 여전히 "그 진실이 증명되었는가"를 묻는다. 국가가 이미 사과한 폭력을, 검찰은 다시 증명하라 한다. 그 사이에서 피해자들은 다시 법정을 오가며, 국가의 침묵과 싸운다.
헌법을 낭독한 검사의 목소리는 잠시 울림이 되었지만, 그 울림은 아직 제도로 이어지지 않았다. 진실은 밝혀졌지만, 정의는 아직 절반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