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설은 인권을 최우선 가치로 삼습니다."
요즘 전국의 장애인 거주시설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문장이다. '인권지킴이단 설치', '인권경영 선언문 선포', '인권실천행동강령 제정' 등 인권이라는 단어는 복지현장의 새로운 유행어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문구가 늘어난 만큼, 현장에서는 "행사와 서류만 남았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한 인권단체 관계자는 "인권이라는 말은 커졌지만, 실제 장애인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 조사에 따르면, 인권지킴이단은 설치됐지만 실질적으로 작동하지 않거나, 시설 내부 인사들이 감시 역할을 맡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는 국가인권위원회가 2022년에 발표한 지적장애인 거주시설 인권침해 실태조사' 보고서에서도 확인됐다.
인권경영 선포의 확산
2024년 12월, 경기 남부 한 거주시설은 '거주인과 함께하는 인권경영 선언문 선포식'을 열었다. 행사장에는 현수막과 포토존이 설치되고, 지역 언론은 이를 "장애인과 직원이 함께 차별 없는 인권을 약속했다"는 주제로 보도했다. 지역 언론 보도를 보면 해당 시설은 2023년에도'인권실천행동강령 선포식'을 열었다.
매년 반복되는 '인권 선언'은 장애인시설의 긍정적 변화처럼 보이지만, 실제 장애인 시설에서 일하는 일부 종사자들은 "인권선언은 평가 대비용 서류로 쓰일 뿐"이라고 말한다.
실제 이 시설은 지난 2022년 직원에 의해 장애인 거주자에 대한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시설은 피해 장애인이 조사를 받고 법원의 재판을 받는 동안 피해자 구제를 위한 노력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장애인의 차별없는 인권', '인권실천행동강령 선포식' 등 앞뒤가 맞지 않는 행보를 보이는 것이다.
왜 이런 모순적인 보여주기 행사를 여는 것일까. 실제 보건복지부의 평가제도에서 '인권보호체계 구축'은 가산점 항목으로 포함되어 있다. 즉, '인권경영 선포식 개최', '인권지킴이단 설치', '인권교육 횟수' 등이 서류로 제출되면 자동으로 점수가 반영되는 구조다. 이 때문에 시설들은 실질적 변화보다 보이는 인권'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인권지킴이단, 이름만 존재하는 감시자
장애인복지법 시행규칙을 보면 모든 장애인 거주시설은 '인권지킴이단'을 설치해야 한다. 하지만 의무적 설치와는 다르게 실제 '인권지킴이단'이 독립적으로 실효적 인권지킴이의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22년과 2023년 두 차례 보고서에서 "지킴이단이 시설 내부 인사 중심으로 구성되고, 회의록이 외부에 공개되지 않아 실질적 감시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일부 시설 홈페이지에서 확인된 인권지킴이단 명단을 보면 시설장, 사회복지사, 후원회 관계자 등 내부 인사 비중이 많다.
외부 위촉 위원은 형식적으로 포함되더라도 회의 참석률이나 활동 기록은 거의 공개되지 않는다. 결국 '시설이 스스로를 감시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셈이다.
사진은 많은데, 변한 건 없다
복지부의 시설평가표를 보면, 인권 관련 항목의 80% 이상이 '서류 제출 여부'로 판단된다. 서류상 존재하는 인권교육 횟수, 회의록 작성 여부, 계획서 수립 등이 요건에 맞으면 '만사 오케이'다. 하지만 정작 '거주인 인권침해 사례 발생 여부'는 평가에서 비중이 낮다.
한 전직 사회복지사는 "평가 직전엔 인권교육 사진을 찍고 회의록을 만들었다. 그게 끝이었다"고 말한다. 이른바 '행사형 인권'이 서류로 기록되고, '생활형 인권'은 여전히 시설 벽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지난 9월, <오마이뉴스>는 '
장애인거주시설 인권침해 예방을 위한 두 제도의 한계'(https://omn.kr/2f6w9)라는 기사에서 "시설의 인권지킴이단과 인권옹호기관 모두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국적 조사에서도 같은 결과
<에이블뉴스>가 2024년 12월 실시한 전국 인권실태조사 결과에서도 거주시설 이용자의 60% 이상이 "인권지킴이단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 모른다"고 답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인권지킴이단은 제도적으로 존재하지만 피해자 보호나 제보 대응 체계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조사에서 인권침해 사례로는 외출제한, 휴대전화 사용 금지, 직원 폭언 및 체벌, 성적 착취 등이 포함돼 있었다.
전문가들은 '인권선언식'이 평가 항목에 직접 반영되는 "점수형 인권행사"로 변질됐다고 지적한다. 한 복지시설 평가위원 출신 관계자는 "시설이 잘 운영되는지보다, 얼마나 서류를 잘 갖췄는지가 결과를 좌우한다"고 말했다. 결국 인권의 본질은 행정의 틀 안에 갇혀 버린 셈이다.
국가인권위의 권고문에서도 "실사 없는 점검은 인권 지표가 아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복지부의 평가 체계는 여전히 문서 중심, 보고서 중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권의 외피를 쓴 행정
<비마이너>는 2025년 7월 기사에서, 경기도가 운영하는 '거주시설 인권모니터링단' 위원 중 다수가 해당 지역 복지시설 관계자라는 사실을 보도했다. 즉, 시설을 감시해야 할 주체가 시설과 직·간접적 이해관계를 가진 인물들인 것이다.
결국 '인권감시'가 '시설 보호'로 바뀌는 구조적 한계가 드러났다. 이러한 제도의 허점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는 어제 오늘이 아닌 꾸준히 제기되었던 문제였다.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첫째, 인권지킴이단을 시설장이 임명하는 구조에서 지자체나 독립 인권옹호기관이 위촉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둘째, 인권선포식·행사는 '인권보호계획의 시작점'이어야 하며, 이후 활동 실적과 피해자 보호 결과가 반드시 공개돼야 한다.
셋째, 시설평가제도는 '문서 중심'이 아니라 이용자 경험·자기결정권·외부 접근성 같은 '생활 중심' 지표로 바뀌어야 한다.
이러한 개선 방향은 인권위의 거주시설 인권보장 체계 개선 권고문(2023)에서도 반복적으로 제시되었다.
"복지의 이름으로 인권을 포장하지 말라"
2025년 4월, 전국 복지시설 단체들은 '장애인의 날을 맞아 책임성 선언'을 발표했다. 하지만 같은 시기, 장애인권단체들은 "진정한 책임은 제도 개선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장애인복지시설의 인권은 지금처럼 행정의 틀 속에서 '보고용 서류'로 남아선 안 된다. 인권의 이름으로 포장된 복지는, 결국 가장 약한 이들의 침묵 위에 세워진 허상일 뿐이다.
인권은 선언이 아니라 행동이다. 인권지킴이단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시설이 안전한 것은 아니다.
'인권선언식'을 열었다고 해서 그곳이 차별 없는 공간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권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다.
복지의 본질은 제도를 운영하는 행정의 편의가 아니라 그 제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엄이다. 진짜 인권은 서류에 기록되지 않는다. 현장 속 변화, 생활인의 선택권, 피해자의 목소리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변상철씨는 공익법률지원단체 '파이팅챈스' 국장입니다. 파이팅챈스는 국가폭력, 노동, 장애, 이주노동자, 환경, 군사망사건 등의 인권침해 사건을 주로 다루는 법률 그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