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 9월 2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특수공무집행방해,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 사건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형사 법정에서 윤 전 대통령의 모습이 공개된 것은 지난 4월 내란 사건 재판 이후 약 5개월 만이다. ⓒ 사진공동취재단
12.3 내란은 단순히 윤석열 개인이 충동적으로 일으킨 사건이 아니었다. 그가 막강한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기는 했어도, 내란을 통해 이런저런 사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익을 챙길 수 있다고 믿었던 많은 고급 관료와 장성 그리고 정치인이 없었다면 그는 처음부터 친위 쿠데타를 기획하고 실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에 대한 정치적 지지기반이 중요하다.
비록 그는 인기 없는 대통령이긴 했어도, 어떤 경우에도 그를 지지할 20~30% 내외의 지지자들이 뒤를 받치고 있었다. 계엄 실패 후 윤석열은 중국 혐오와 부정선거라는 거짓 선동을 통해 특히 바로 이들을, 자신을 위한 적극적 수호 부대로 만들려 했는데, 이런 시도는 꽤 성공을 거두었다. 1.19 서부지법 폭동, 전광훈 목사와 손현보 목사가 주도했던 극우 집회들, '백골단'이나 '자유대학' 같은 청년 극우들의 준동 등은 바로 그 결과였다.
이런 점에서 12.3 내란은 파시즘이 21세기 한국에서도 유사한 모습으로 발흥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과거의 파시즘에서는 특히 '폭민(暴民;mob)'이라고 규정되는 대중들이 지도자와 일체감을 느끼며 자발적으로 나서 정치적 적으로 규정된 사람이나 세력에 대해 극단적인 증오와 혐오를 폭력적인 방식으로 분출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 열성적 대중 동원은 파시즘을 단순한 군부 독재와 구분시켜 주는 가장 중요한 지표다. 다른 사안들은 제쳐두고라도, 윤석열의 내란 시도와 그 이후의 사태 전개에서 이런 파시즘적 징후를 읽어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런 식의 광범위한 극우 대중, 특히 '청년 극우'의 준동이었다.
극우 포퓰리즘의 준동
얼핏 윤석열의 내란은 우리 현대사의 파시즘 전통을 부활시키려 했던 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번 내란이 촉발한 파시즘적 정치 흐름은 과거와는 기본 성격이 다르다고 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이 흐름이 고도로 선진화된 자본주의와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안착한 민주주의 체제에서 출현했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과거의 파시스트 세력은 어떻게든 보수라는 이름으로 민주적 헌정질서라는 틀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바로 우리 국민 상당수가 이 세력의 내란 옹호 선동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현상을 단순히 과거 군사 파시즘의 잔재나 부활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카스 무데의 널리 알려진 구분을 빌리자면, 극우(far right)는 '극단 우익(extreme right)'과 '급진 우익(radical right)'으로 나눌 수 있다. 극단 우익은 파시즘 같이 민주주의의 본질인 국민주권과 다수통치를 부정하는 데 반해, 급진 우익은 민주주의의 본질은 수용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기본 요소인 법치나 권력분립, 소수자 권리 등에는 반대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최근 들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이다. 이번에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도 이 극우 포퓰리즘의 준동을 목격했다.
이 포퓰리즘 개념을 단순하게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통상 포퓰리즘은, 사회가 선량하고 순수한 보통 사람들인 '우리'와 부패한 엘리트 및 그들이 지지하는 불순한 외부의 적으로 구성된 '그들'로 나뉜다고 주장하면서, 이 '우리'와 '그들'의 대결을 부추기는 정치를 지칭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주로 이주민들과 난민들 및 그들을 나라 안으로 끌어들인 좌파 정치인들이 포퓰리스트 세력이 배척하고자 하는 '그들'로 지목된다. 한국에서는 대표적으로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다름 아닌 '중국'의 위협을 강조하고 여성이나 장애인 같은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면서 이런 서구 포퓰리즘의 정치 행태를 모방하고 있다.
12.3 내란 이후 우리 사회에서 확인된 파시즘적 정치 흐름에서 가장 새로운 점은 바로 이런 극우 포퓰리즘의 전략을 채택하는 데 있다. 오늘날 극우 포퓰리즘과 파시즘 사이 또는 극단 우익과 급진 우익 사이의 경계는 언제나 명확하지 않고 서로 유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새로운 파시즘을 단순히 과거 군부 파시즘의 부활이라는 차원에서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것은 또한 파시즘을 좁게 과거 유럽과 일본에서 나타났던 특정한 정치 운동이나 정부 형태라고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날 파시즘은 21세기라는 새로운 조건 속에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양상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도 나름의 고유한 방식으로 이 새로운 파시즘이 등장하고 있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만의 파시즘이 있다"라는 프리모 레비의 지적이 참으로 뼈아프게 다가온다.
나는 오늘날 파시즘을 단순한 역사적 파시즘의 부활이나 특정한 정부 형태라기 보다는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전술(전략)"이라는 차원에서 파악하자는 미국의 철학자 제이슨 스탠리(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부모를 둔 그는 최근 트럼프의 두 번째 대통령 당선을 보면서 반-파시즘의 중심지를 만들기 위해 캐나다로 이주했다)의 제안에 주목하고 싶다. 이런 접근이 역사적 파시즘이나 우리의 과거 군부 파시즘과의 관련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맥락과 조건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극우적 정치 흐름의 핵심을 포착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스탠리는 그 핵심을 "'우리'와 '그들'의 정치"로 규정하는데, 이 '파시즘적 정치'는 기본적으로 혐오와 배제의 정치다. 그러니까 선량하고 애국적인 '우리'와 반국가적이고 불의하며, 따라서 배제하고 혐오하는 게 정당화되는 '그들(난민, 페미니스트, 노동조합, 인종적, 종교적, 성적 소수자 등)'을 갈라치기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려는 모든 정치를 이 틀에서 파악할 수 있다. 오늘날 유럽과 미국의 극우 포퓰리즘 운동에서는 물론, 폴란드, 헝가리, 터키, 심지어 브라질과 인도에서도 이런 파시즘적 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 12.3 내란 이후 윤석열이 촉발한 한국 극우 정치의 전개 양상도 이런 맥락에서 그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현재화하고 있는 파시즘적 정치는 단순한 과거 회귀의 시도라기 보다는 오늘날의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조건 위에서 발생한 정치적 병리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 병리는 전 세계적인 수준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실패와 투기적 금융자본주의의 지배가 빚어낸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불안정성 그리고 문제해결력을 상실한 정치 체제에 대한 대중적 불신과 반감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권력을 획득하려는 일부 엘리트의 모험주의적 정치 기획이 전 세계적으로 파시즘적 정치를 불러내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21세기 새롭게 창궐하고 있는 이 파시즘적 정치는 과거와 같은 폭압적 통치 양식을 반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안착한 나라들의 경우 민주주의의 외피를 완전히 벗어던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 민주주의는, 러시아, 헝가리, 터키, 인도 등에서 확인되듯이, 선거라는 민주주의의 외양은 유지하면서도 시민의 기본권에 대한 온전한 보장이 없고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교묘하거나 노골적인 탄압이 일상화되는 '비-자유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 또는 '경쟁적 권위주의(competitive authoritarianism)'로 나타난다. 지금 세계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미국도 트럼프 대통령의 2기 집권 이후 바로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진단이 넘쳐난다. 그리고 이런 미국은 우리의 반면교사다.
물론 우리나라는 새 정부가 구성됨으로써 12.3 계엄령으로 크게 흔들렸던 헌정질서는 일단 회복되기는 했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가 극우로 치닫고 있는 대중들의 불만을 제대로 잠재우지 못해 5년 후에는 다시 미국처럼 더욱 강력한 극우 정부를 불러들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사실 윤석열 대통령은 앞선 민주당 정부가 경제 정책 등에서 보인 무능이 빚어낸 산물인데, 비슷한 일이 반복될 수도 있다. 만약 극우화한 국민의힘이나 그 후속 정당이 다시 집권한다면, 그때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번과 같은 방식으로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민주주의를 더 강하게 회복력 있는 상태로 만들어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이런저런 시도들에 맞서 방어해 내야 한다. 설사 민주 정치가 '파시즘 바이러스'의 확산을 제때 막지 못하거나 파시즘적 정치 전술이 예기치 못한 승리를 거두게 될 때도 민주적 헌정질서만큼은 굳건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립니다. 글쓴이 장은주 인권연대 칼럼니스트는 현재 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