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역사는 가히 '외세의 침략과 수탈'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육지로 쳐들어오는 적도 있었지만, 바다를 끼고 침범하는 적도 부지기수였다. 배를 타고 육지에 상륙한 적의 목표는 땅을 빼앗는 것이 아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식량과 물자를 약탈하고 쓸 만한 사람을 데려가면 그만이다.
동해안을 마주하고 있는 강원도 역시 외적의 침입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유구한 약탈 역사가 있는 왜구부터 유목민족인 여진족까지 강원도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지금도 강원도 해안 곳곳에는 방어 시설의 흔적이 남아있다. 우리 가족은 희미해져 가는 고려의 군사시설 흔적을 찾아다녔다.
고려의 군사시설을 보려면 눈을 크게 뜨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한다. 광화문처럼 자동차를 타고 지나치다가 우연히 볼 수 있는 종류의 시설물이 아니다. 모험을 떠나는 마음으로 신발끈을 묶어야 한다. 우리가 찾은 첫 번째 장소는 강릉 고려성이다. 고려성은 정동진 해수욕장과 인근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있었다. 내가 여진족 침략자였다면 너무 탐스러워서 군침이 흐를 법한 풍경이었다.

▲고려 초기에 만들어져 아직까지 성벽의 외형을 간직하고 있는 강릉 고려성 ⓒ 이준수

▲고려성이 끊어진 자리 옆으로 동해 바다가 펼쳐져 있다. 바다는 주민에게 삶의 터전이었지만, 외적의 통로이기도 했다. ⓒ 이준수
생활 터전 한가운데 놓인 작은 성의 의미
성이라고? 여긴 그냥 마을 아닌가. 고려성의 위치를 지도앱에서 처음 검색했을 때 드는 물음이었다. 아무리 남아있는 성벽의 길이가 50미터 남짓이라고 하나 이렇게 주택에 가깝다니. 지도에서 고려성을 가리키는 작은 점은 주택과 주택 사이에 끼어있듯 놓여있었다. 오류를 의심하던 찰나,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은 두 발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다.
괘방산 아래 등명낙가사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내리자마자 보이는 건 사람 좋아 보이는 포대화상 석상이다. 푸짐한 배와 넉넉한 웃음에 이끌려 등명낙가사로 들어갈 뻔했지만 나의 목적지는 등명낙가사가 아니다. 단풍이 든 괘방산 탐방로에 들어섰다. 잘 포장된 임도를 따라 튼튼한 나무가 가지를 드리운 멋진 길이었다.
십 분 가량을 걷자 주택 몇 채가 모여있는 아담한 마을이 나왔다.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지도상의 그 마을인 듯했다. 그리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듯이 어느 주택의 담장처럼 고려성이 서 있었다. 규칙성이 느껴지는 돌무더기. 등산로 한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돌탑과는 확연히 달랐다. 의도적으로 돌이 수직에 가깝게 쌓여 있었다. 석벽은 길게 장막을 이루듯 이어졌다.
위세가 대단한 압도적인 건축물은 아니다. 성벽의 높이가 낮고, 돌을 쌓은 방식도 정교하지는 않다. 다만 곱씹어 볼수록 놀라운 구석도 있다. 성벽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틈틈이 보수가 이루어졌다. 실질적으로 성벽을 사용해야만 하는 상황이 계속 발생했다는 의미다. 일시적인 전투를 대비한 성이 아니었다. 갓길을 따라 성벽 뒤쪽도 살펴보았다. 그러자 의외의 반전이 드러났다.

▲성벽의 뒷면. 내축방식은 외벽만 석축이 되어있다. ⓒ 이준수
성곽인가, 돌무더기인가... 생존용 성벽
"이게 성이야?"
함께 손을 잡고 갔던 아이가 불쑥 말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언뜻 보면 돌을 대충 괴어놓은 것 같았다. 앞에서 보는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정동진의 흙과 돌을 옮겨와 투박하게 만든 성의 뒷면. 전형적인 '내탁방식' 성벽이었다. 내탁은 안쪽에서 쌓는다는 뜻으로 외벽만 석축을 하고 안쪽은 흙이나 돌로 채운 것을 말한다.
나는 농사를 짓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틈틈이 돌을 쌓는 고려의 옛 주민들을 떠올렸다. 바다는 삶의 터전이기도 하지만, 외적의 침입로이기도 했다.
"누가 배를 타고 여기까지 쳐들어온 거야?"
"고려시대에는 여진족과 왜구들이었지."
"나는 성까지 오르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 멀리까지 왜 왔어?"
"직접 농사나 물고기를 잡는 것보다 약탈이 손쉬웠기 때문이겠지."
"주민은 진짜 짜증 났겠다. 언제 적이 나타날지도 모르고. 미리 준비하면 좋을 텐데."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적의 침입을 사전에 알고 대비할 수 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가능하다면 멀리 떨어진 다른 마을에도 공격받았다는 신호를 보내면 좋다. 함께 대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도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통신 시설이 있었다. 바로 봉수대다. 동해시 어달산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봉수대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차를 남쪽으로 몰았다. 그날이 삼주 연속으로 봉수대 등반에 도전하게 될 첫 번째 시도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르는 채로.

▲동해시 어달산 정상에 봉수대 기단이 남아있다. 봉화 시설을 복원하면 어떨까? ⓒ 이준수

▲강릉시 포남동에 위치한 '소동산 봉수대'. 주변을 정비한 이후 봉수대 일대가 마을의 축제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 이준수
삼주 연속 도전기, 어달산 봉수대를 향하여
어달산 봉수대를 처음 방문한 날은 일주일째 비가 주룩주룩 내린 직후였다. 등산로는 진창이 되어있었다. 산에서 크고 작은 물줄기가 계속 흘러나왔다. 강릉에서 동해까지 내려온 고생이 아까워 등산로 옆 산길로 올라가 보았지만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발이 계속 미끌거렸다. 봉수대는 고도가 높은 곳에 세워야 하니 길이 험한 것은 당연하다. 도저히 진행이 불가해 다음 주말을 노리기로 했다.
그러나 비는 그다음 주에도 계속 내렸다. 나는 봉수대에 근무교대를 해야만 하는 고려시대 병사의 심정으로 다시 봉수대에 도전했다. 아니나 다를까 길의 상황은 더 심각해져 있었다. 소형 굴착기가 힘으로 밀고 올라갔는지, 진흙 길 깊이 무한궤도 자국이 뚜렷했다.
전문 등산화를 착용하고 왔건만 100미터를 채 올라가지 못하고 바지만 엉망으로 만든 채 내려왔다. 봉수대는 험지에 세워야만 적에게 쉽게 점령당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공감하며 다음 기회를 노렸다.
천만다행으로 비는 완전히 그쳤다. 건조한 날씨가 이어졌다. 일주일의 시간이 흐른 어느 주말, 나는 아이들을 양손에 잡고 어달산 봉수대에 다시 도전했다. 물기가 날아간 등산로는 화성 표면(영화에 나오는 메마르고 기괴한) 같았다. 2022년 산불에 봉수대도 피해를 입었다는데 지금은 괜찮을까? 이런저런 궁금증을 안고 정상에 올랐다. 연기를 피우면 선명하게 잘 보일 것 같은 맑은 날이었다.
봉수대는 기단만 남아있고 봉화를 올리는 시설은 없었다. 봉수대를 설명하는 안내판의 글자도 지워져 있었다. 산불에 그을려서 사라졌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1996년도에 만든 돌로 된 안내석은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풍경이 탁월해서 실망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봉수대 기단 옆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바다를 관찰하고, 다른 산의 봉수대와 연락하기에는 최적의 입지라는 확신이 들었다. 과거에는 밤낮으로 연기와 불을 피워 올렸을 것이다.
안내석에 따르면 어달산 봉수대는 강릉의 오근산과 삼척 광진산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문득 강릉의 '소동산 봉수대'처럼 복원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수는 안전의 연결고리를 상징한다.
'소중한 생명을 보호하고, 재산을 지키는 연대의 시설은 현대에도 보존할 가치가 있지 않나'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났다. 강릉의 소동산 봉수대 일대는 공원처럼 꾸며져 시민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어달산 봉수는 고려시대에 처음 세워졌으므로 '소동산 봉수대' 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언젠가는 재조명받지 않을까 싶다.

▲정동심곡바다부채길 옆 '투구바위'. 강감찬 장군이 육발 호랑이를 쫓아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 이준수
사실과 믿음 사이, 전설이 만든 바위
마지막으로 방문한 장소는 강감찬 장군의 전설이 깃든 '투구바위'이다. 투구바위는 '국가유산'도 아니고 '강원도기념물'도 아니다. 정동심곡바다부채길을 열심히 걷다 보면 코스 중간쯤에 등장하는 해안가 바위다. 그런데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다. 옆에서 보면 꼭 투구를 쓴 장수처럼 보인다.
강릉에는 고려의 명장 강감찬 장군과 관련한 설화가 여럿 전해 내려온다. 그중 하나가 밤재라는 고개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무서운 '육발호랑이'를 강감찬 장군이 도술로 물리쳤다는 이야기다.
"아빠, 진짜로 강감찬 장군이 강릉 부사였어? 변신한 호랑이도 물리치고?"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겠지. 강감찬 장군은 고려의 영웅이었거든. 귀주대첩으로 거란족을 깨부순."
"그럼 투구 바위는 그냥 강감찬 장군이라고 믿는 거야?"
"응, 때로는 진짜가 아니어도 믿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니까."
강감찬 장군을 닮은(혹은 믿고 싶은) 바위가 우뚝 서서 동해를 바라보고 있으니 왠지 든든했다. 외적을 막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위안을 주는 존재도 필요하다. 바다부채길을 걷던 많은 관광객이 가던 길을 멈추어 서서 바위를 지켜보았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드물지 않았다. 투구바위는 여전히 호국의 전설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내가 딛고 서 있는 이 땅은 누군가의 피로 지켜낸 곳이다. 성벽과 봉수대와 투구바위에서 나는 옛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목숨을 걸고 살지 않아도 되는 일상이 감사해지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