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17일 봉하마을 고 노무현 대통령 묘역에 참배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 윤성효
노무현은 정치인이면서도 정치적이지 않았고, 최고 권력자가 되고서도 권력을 향유하기보다 분권을 지향하고, 권모술수와 암투를 몰랐던 대단히 투명한 사람이었다. 의기가 매우 높고 용기도 있어서 단신으로 두터운 수구의 암초와 보수의 벽을 뛰어넘어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 변호사, 국회의원, 장관 등 세속적으로 '출세'하고도 세상을 되는대로 살지 않고, 어떤 이상과 목표 아래 고귀한 행동원칙과 정신의 진보를 믿으면서 살았다. 스스로 영혼을 천박하게 만들고 자신을 고갈시키고 시들어버리는 속물 정치인들이 주류가 되는 당시의 정계에서 그의 존재는 남달랐고 그래서 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의 적은 대부분 사적 이해관계가 아닌 공적(公敵)이었다. 그의 존재로 인해, 민주주의·인권·양심·정의·화해·통합·사람다운 세상이 실현되고, 부당하게 취득한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 당한다고 믿는 세력이었다.
그는 대단히 소탈하고 서민적이어서 권위(주의)를 싫어하고 온화하고 겸허한 마음과 겸양의 정신을 가졌다. 정략과 위선의 '친서민'이 아닌 진정한 서민과 노동자의 벗이었다. 퇴임 뒤에 '악인'들에게 몰리면서도 결코 비루하지 않았고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다. 그는 너무 빨리 역사책속으로 사라졌지만, 역사는 결코 패배자로 기록하지 않는다. 해마다 100만 명이 넘는 추모객이 그의 묘소를 찾는, 이른바 '노무현 현상'이 이를 말해준다.
노무현이 꿈꾸었던 '사람사는 세상'은 거창한 유토피아가 아니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하나의 증거를 꼭 남기고 싶다"는 거였다.
'노무현의 꿈'은 특별히 진보적이거나 개혁주의 사상이 아니었다.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이고 공화제의 본령이었다. 그동안 이런 가치가 지켜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공권력을 사유화한 오만한 권력자, 공직을 부끄럽게 한 검찰, 사기업인 신문을 정치권력화한 족벌신문과 어용화된 공영방송, 굴절된 프리즘을 통해 왜곡된 모습을 그린 사이비 지식인들, 반세기 전의 냉전의식에서 사고가 화석화된 수구세력이 한덩어리가 되어 모진 언어폭력과 날샌 비수를 그에게 던졌다.
대한민국은 4월혁명, 부마항쟁, 10·26거사,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수평적정권교체를 통해 제도적 민주화를 가져오고, 김대중·노무현 민주정부 10년을 통해 어느 정도 실천적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프랑스혁명기 '테르미도르(Thermiclor)의 반동'처럼 역주행의 시대가 그토록 빨리 도래할 지는 아무도 몰랐다. 반동적 정치권력과 여기에 부역한 검찰. 국세청·족벌신문, 어용방송이 '악의 축'을 이루어 역사를 뒤로 돌리고, 권력기관의 자율성을 보장한 노무현을 형장으로 '몰이사냥'할 줄은 더구나 몰랐다.
빛이 오고 난 뒤에도
우리가 한 번 더 이토록
어둠 속에
살아야 했다는 사실을
후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카스 텔리오, <의심의 기술>.

▲봉하마을 고 노무현 대통령 묘역. ⓒ 윤성효
민주주의는 상대주의, 중립성, 관용사상을 골자로 한다. 이 세 가지 가치 중 하나라도 빼앗기면 민주주의는 절름발이가 되거나 형해화한다.
퇴임 1년여 만에 민주주의 3대 가치가 박탈되거나 짓밟히고, 마침내 '포로'가 된 노무현이 비루하지 않고 최소한의 존엄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내던지는 일뿐이었다. 이것은 그의 최고의 장점인 진정성을 지키는 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부엉이바위에 올라섰고, 망설이지 않았다. 사후 묘역에 인분을 뿌리는 실성한 자가 있었고, 경찰청장(조현오)이 '차명계좌' 운운하면서 고인을 욕주는 발언이 있었지만, 거인(巨人)의 초상이 오염되지는 않았다.
구어체 현장언어로 소통하고 술수를 부릴 줄 몰랐으며 순박하면서도 품격이 있었던 대통령 노무현, 위선이나 가식,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던 권력자, 소탈한 성격에 신분이 바뀌고 지위가 변해도 평민의식을 가졌던 지도자, 이슬 머금은 댓잎처럼 항상 파랬던 인물이다.
수구세력은 처음부터 그의 등장을 싫어했다. 자신들의 기득권 울타리를 해칠 지 모른다는 위기감에서였다. 술수와 거래가 통하지 않으니 불안하고 그의 강고한 혁신과 소신이 두려웠다.
변호사가 되고 국회의원, 대통령이 됐으면 '특수계급'에 편입해야 함에도 그는 아니었다. 해서 수구세력의 저주와 비난과 공격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재벌에 특혜를 주지 않으니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라 비아냥거리고, 퇴임 후에는 먼지 털기식을 넘어 세균찾기식 검찰 수사를 벌이고 족벌언론이 맞장구쳤다. 취모멱자 (吹毛覓疵)라는 고사(머리카락을 불어가며 흉터 찾기)의 용어까지 등장했다.
지나고 보니, 견주어 보니, 그는 무척 근기(根氣) 있고 기국(器局)이 큰 지도자였다. 지역주의 벽을 깨고자 험지를 찾아 출마하고, 집권해서는 야당(당시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스스로 쪼개고 나누겠다는 것은, 용렬한 권력자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파격이었다.
자신에 대한 보복이나 명예의 실추보다 '진보의 실패'로 엮으려는 수구세력의 속셈을 꿰고는 몸을 던졌다. 봉하마을에서 농사지으며 평범하게 여생을 보내고자 했으나 저들은 그것마저 불안했다.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쓰고 있던 밀짚모자를 벗어 답례하는 모습에 저들은 견디기 어려운 외포감을 느꼈으리라.
2009년 5월 23일 진영읍 부엉이바위에서 뿌려진 선혈(鮮血), 그 처연한 핏자국이 풍상으로 씻기우기에는 너무 비극적이고, 죽임으로 몰아간 한국사회의 야만성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대통령까지 지낸 사람이었지만 그는 끝까지 변방인이었다. 집권기간에도 이 나라의 권력은 보수세력의 수중에 있었다. 그의 말과 정책은 끊임없이 조롱당하고 우롱당하고, 정책은 배척되었다. 자신을 뽑아준 정당의 일부까지 합세한 보수세력은 그를 탄핵하기에 이르렀고, 퇴임 1년여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내몰렸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과 죽임은 단순히 현대사의 일과성 사건이 아니다. 진보 개혁 인물을 거부하는 한국 수구보수세력의 총체적인 힘의 작동이었다. 멀리는 조광조와 전봉준, 가까이는 김구·조봉암·김대중(미수)·장준하를 죽인 한국적 '길로틴'의 야만성을 알아야 한다.
노무현의 투신 소식에 미국 로스앤젤레스타임스가 "한국 대통령 역사상 가장 불행하고 비극적"이라고 논평할만큼 '불행하고 비극적'인 이 사건은 그가 퇴임 1년 여 만에 "고통이 크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토로할 정도로 공정해야 할 국가형벌권이 남용되고, 권력화된 언론의 횡포가 죽임의 형구(刑具)가 될만큼 한국사회의 모순구조를 보여주었다.
노무현인들 왜 실책이 없었겠는가. 대연정 제안,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졸속추진,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확대와 양극화 심화에 대한 정책적 대안 미흡 등 과오와 실책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원칙을 지켜 내려는 개혁을 꾸준히 실천하고, 청와대의 권위주의적 권력행사를 중단했으며, 각급 선거에서 돈 들지 않은 공정한 선거의 틀을 만들어 정치판을 정화시켰다. 무엇보다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바르고 정직하게 살면 성공할 수 있다"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희망과 꿈을 안겨주었다.
그는 권력과 부의 세습에 찌든 한국사회에, 그래서 희망과 삶의 의욕을 잃은 다수의 민초들에게 한 바가지 맑은 마중물의 역할을 해주었다. 하지만 수구 기득세력에게는 이것이 크게 못마땅했고 멸살의 대상이 되었다.
친일과 친미, 친독재를 통해 구축해 온 특권과 부를 대대손손 세습하면서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노무현의 '특권이 없는 사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도발이었다. 그것도 대통령이 된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는 데는 피가 거꾸로 치솟았을 것이다.
국권을 일제에 넘기고도 작위와 은사금을 받아 특권을 유지하고, 주권을 독재자에게 넘기고도 감투와 특혜를 받아 부귀를 누려온 자들이었다. 어떻게 형성한 특권인데, 학벌도 없는 촌놈이 갑자기 나타나 수백 년 누려 온 한국적 '카스트제도'를 허물려 드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링컨의 '노예해방'에 아메리카의 거대 지주계급이 분개하고 마침내 그를 죽였듯이, 이 땅의 특권층은 '카스트제도'를 허물려고 선동하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종북좌경의 딱지를 붙이거나 죽임으로 몰아갔다.
노무현에게 '허물'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남북화해 협력의 추진이었다.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개성공단의 가동 등은, 분단과 대북증오심을 이데올로기로, 무기삼아 특권과 부를 누려온 자 들에게는 용납되기 어려운 제거의 대상이다. 김대중이 그 길을 닦았지만, 그는 이미 노령이고 병환으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기에, 타깃은 노무현이었다. 그는 아직 젊었고 봉하마을은 마치 무슨 성지처럼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았다. 가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 세상에서 암살 중에서도 가장 안전하고 완벽한 것은 '자살형'이다. 지령자와 하수인, 정범과 종범이 가려지지 않고 형법을 비롯하여 각종 실정법을 피할 수 있으며, 지지자들로부터 저항과 분노의 대상을 삼제(芟除)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정법을 피한다고 하여 역사의 법정과 하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3심제가 있듯이 자연계에서는 실정법 심판, 역사심판, 그리고 하늘의 심판이 전개된다.
고통과 무력감 속에서 극단적 최후를 선택하도록 강제된 근원이 이명박 정부의 정치보복에 있음을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정권의 도덕적 기반이 워낙 취약하기에 전임자에 대한 단순한 예의조차 고려할 여유를 가릴 수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의 죽음이 남긴 교훈이 보복으로 악순환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는 유서의 한 마디가 깊은 울림을 갖는 것은 그림이 현실적 차원과 현실원의 현실 초월적 차원을 동시에 함축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발전과 민주주의의 수호에 자신의 죽음이 소신공양으로 바쳐질 것을 그의 무의식은 소망했을 것이라 믿어도 좋다. (주석 1)
주석
1> 염무웅, '노무현의 삶이 이룬 것과 그의 죽음이 남긴 것', <A4 두 장으로 한국사회 읽기>, 83쪽, 창비, 2009.
덧붙이는 글 | [현대사의 논쟁과 쟁점]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